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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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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799회 작성일 04-12-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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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미팅 특강 2004. 11. 25.

예배의 훈련
(리처드 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p227-249)

 이엘리야

I. 들어가는 말

  ‘예배의 훈련’이라고 할 때 먼저 ‘예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 ‘훈련’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종합해서 예배가 “영적 훈련”으로 생각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를 숙고하고자 한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세우는 사건이다. 예배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다. 예배는 모인 공동체 속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쉐키나(Shekinah)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의 영광(혹은 광채)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추상적이거나 혹은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임재해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쉐키나에 의해서 점유되는 것이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나고 서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제하고 삶을 나누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적극적으로 찾고 계신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예배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에 따른 인간의 응답이다.  예배는 아버지의 마음 속에서 나온 사랑의 제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예배의 핵심은 “신령과 진정”에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인간의 영혼을 만지실 때 비로소 우리 속에 불붙여 진다.

  형식과 의식만으로는 예배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모든 좋은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고 또 가장 훌륭한 예배 의식을 가질 수도 있지만, 성령이 우리의 영혼에 접촉하기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접촉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자유케 하시기 전에는 우리가 예배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노래와 기도와 찬양, 이 모두가 예배와 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예배는 그런 것들 이상의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불로 불붙여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예배의 형식 문제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형식이 이차적이라고 해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유한한 인간인 이상 형식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 체험을 구체화할 “포도주 부대”가 있어야 한다. 예배의 형식이 중요하나 형식이 예배는 아니다. 예배로 이끌어 주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어느 형식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이를 개혁해야 한다. 그리고 예배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제 훈련이란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훈련은 국어 대사전 국어대사전(민중서관 2000.)에 “일정한 목표 또는 기준에 도달케 하기 위한 실천적 교육 활동, 훈육, 덕육과 같은 의미로 쓰이며, 또는 기술적. 신체적인 경우에도 적용함”으로 되어 있다. 영적 훈련의 목적은 이기주의와 공포의 노예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데 있다. 인간의 영혼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일을 침울한 고역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영적 삶의 훈련은 노래와 춤과 외침으로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 리처드 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16..) 기쁨이 모든 훈련의 기조이다. 보통 훈련은  우리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예배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됨(정체성)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훈련이라는 것은 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상 속에 드러내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은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이루어져야 함은 물론이고 산제사로 자신을 드리는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영적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예배가 정해진 행동과 방법이라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행동과 삶의 방법이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에 응답할 뿐이지만 예배의 세계에 들어가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있다. 예배의 훈련은 개인 훈련에 기초해서 단체 훈련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II. 예배 준비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배의 특징은, 사람들이 “거룩한 기대” 속에 모였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었다. 모세가 성막에 들어갈 때,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간다고 알았다. 이 사실은 초대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핍박을 당해 간절히 기도했을 때 모인 곳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진동한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전에도 발생했었다(행2:2, 4:31).
  초대 교회 신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것과 모세와 아론처럼 지성소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중재자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두렵고 영광되고 자비하신 임재 앞에 들어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모였으며, 또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능력으로 그들에게 접촉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모였다.

  이 “거룩한 기대”를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쉐키나에 들어갈 때 우리 속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내적 예배와 찬양으로 채워질 수 있다. 우리는 일하고 놀고 먹고 잠자면서도 우리의 스승으로부터 듣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

  프랭크 라우바하의 글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다는 의식이 가득 차 있다. “오늘의 모든 기적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이 이것이니, 내가 주님에게서 듣는 일을 할 때 내가 주님을 가장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 또한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계속적으로 대화하는 습관이 날마다 더 쉬워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생각이 주님과의 대화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Frank C. Laubach, Learning the Vocabulary of God(Nashvill: Upper Room, 1956), 9922-23.)
  브라더 로렌스도 역시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부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도 하나님을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는 일 없이 신자가 만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Brother Lawrence,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생명의 말씀사 역간, Nashvill: Upper Room, 1950), p32. )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쉐키나를 체험한 일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는 일 없이는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없다.

  로렌스와 라우바하로부터 비전을 받은 우리는, 현재의 스승이신 예수님과 항상 교통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우기 위해서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 성경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의 증거를 영감하심으로써 이루어졌다. 요20:30-31절은 도마와 달리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믿음에 도달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기록된 성경을 읽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신앙에 도달하는 증거를 제공하기 위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증거이다. 비록 신적 증거는 우등하고 인간적인 증거는 열등하지만(요5:34), 성경에 들어있는 인간적인 증거는 신앙에 이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조병수, MAPTYPIA(증거)와 ΓPAΦΗ(기록)로서의 요한복음 (2004.4.15. 정론), The Nature of John's Gospel, p.15.) 그러므로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역사적인 사건과 현재적인 사건을 통하여, 때로는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마5:26-33). 우리의 소원은 매 순간을 하나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보내는 것이다. 물론 여러 시간을 그렇게 보내지 못할 때가 자주 있다. 때로는 여러 날을 그렇게 보내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뉘우치고 다시 노력해야 한다.

  거룩한 기대를 가지고 공중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 그때에 괴로운 마음과 산만한 마음을 가지고 참가한 사람들도 곧 고요한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모인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위로 향하게 된다. 분위기가 기대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도록 하는 실제적 방법이 있다. 한 주간 내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후사답게 생활하도록 하라. 당신이 한 주간 내내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공중 예배에 모일 때도 주님의 음성을 들을 것을 알게 된다.
  예배 시간 십분 전에 참석하기 바란다. 마음을 높여 영광의 왕을 경배하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존귀와 영광과 자비를 묵상하기 바란다. 이사야가 본 “높이 들린” 하나님의 환상을 마음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사6장). 또는 요한이 “눈은 불꽃 같고, 음성은 많은 물 소리 같은” 그리스도를 본 그 장엄한 계시를 마음 속에 그려보기 바란다(계1장).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기를 구하기 바란다.
  그 다음에는 목사나 예배의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이 발하기를 구하라. 하나님의 광채 쉐키나가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상상하라.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기를 마음 속으로 구하라.
  교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둘러보아 중보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는다. 아마 그들은 어깨가 처져 있든지 혹은 다소 슬픈 기색을 보일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임재하는, 영광스럽고 새 힘을 주는 빛에 들어가도록 간구하라. 그들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상상하라. 예배 시간 내내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어떤 집회에서든지 몇몇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모든 사람의 예배 체험이 깊어질 것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또 하나의 생동적인 특색은 그들이 예배에 함께 “모여 있다”는 의식이었다.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로 하나의 집단으로 모인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개인주의를 초월한 일치의 정신을 가지고 모였다. 큰 위험이 따르는 상황에서도 초대 교회 공동체는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도록 촉구 받았다(히10:25). 서신들을 보면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 곳이 자주 나온다. 머리와 팔과 다리가 없는 인간 생활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서로 관계를 가지지 않고 고립되어 사는 그리스도인을 생각할 수 없다. 마틴 루터는 “나 자신의 집에서는 내 속에 뜨거움이나 활기가 없었는데, 교회에서 무리들이 함께 모였을 때 나의 마음 속에 불이 붙었고 그 불빛이 비쳤다” (Douglas Steere, Prayer and Worship(New York : The Edward W. Hazen Foundation, 1942), p. 36.) 고 증언하였다.

  우리가 함께 모여서 진정한 예배를 할 때, 나 혼자에게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물론 단체 심리라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단체 심리 훨씬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완전히 침투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성경 기자들은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코이노니아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가지는 깊은 내적 친교이다.
  이와 같은 체험은 단체 정신을 초월한다. 또한 그 체험은 동지적 결합이나 서로의 삶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 체험 가운데 우리의 분리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녹아 없어진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일치감을 가지게 되며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모든 말을 잠잠케 하는 일치감과 주님의 임재를 말이다. 또한 더 큰 생명 속에서 우리를 고요하게 감싸는 일치감과 주님의 임재를 말이다.” (Thomas R. Kelly, The Eternal Promise(New York : Harper & Row, 1966), p. 72.)  예배를 통한 이런 친교는 텔레비전이나, 위성을 통한 예배 등 매체를 통한 예배를 무미 건조한 것으로 만든다.
 
Ⅲ. 예배의 인도자

  진정한 예배의 인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의 인도자라 하는 것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 가운데 살아 계시고 임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음성이 그 백성의 마음에 들려질 수 있고, 예수님의 임재가 그들의 마음에 알려질 수 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에 의하여 예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훈계하시고 위로하기를 원하신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직분을 통하여 살아 계시고 임재하신다. 예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대속주가 되시는 그의 제사장 직분을 통해서만 보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언자요 왕으로도 우리 가운데 계신다. 다시 말하면 의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그분의 모든 능력을 통하여 살아 계시고 임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하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든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시므로 우리는 예배에서 기적이 발생할 것을 기대한다. 내적인 치유와 외적인 치유는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통칙이다. 사도 행전은 우리가 읽는 책이 아니라 체험하는 책이다.

  넷째로, 그리스도는 오직 그 분만이 인간의 어떤 도구가 사용될지를 결정하신다는 의미에 있어서 예배의 인도자이시다. 사람들이 설교를 하거나 혹은 찬양을 하거나 혹은 기도를 하는 것은 그들이 인도자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명예가 높아질 여지가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영예를 받으셔야 한다.
  우리의 살아계신 머리가 우리를 불러 세우셨기 때문에 성령의 각 은사는 기쁨으로 받아야 하며 기쁨으로 활용해야 한다. 우리가 지식의 은사를 받아서 사용하는 것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우리가 찬양의 은사나 혹은 권면의 은사를 받아서 분주하게 활동하는 것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이다. 설교하는 일이나 혹은 가르치는 일도 머리되신 예수님이 예배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하여 마련하셨기 때문일 수 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설교는 서릿발같이 예배를 냉랭하게 한다. 마음으로부터 하는 설교는 예배의 영에 불을 붙이지만, 두뇌의 설교는 불을 덮어 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는 설교만큼 생명을 주는 것은 없고, 인간의 사상으로 하는 설교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그리스도가 예배의 인도자라는 이 말이 인간 인도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 지을 수 없다. 권위와 동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예배로 인도할 영감받은 인도자를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예배를 거의 드릴 수 없을 것이다(엡4:11)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라는 각 사역의 특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목사 : 은사적인 면에서 목사는 그 성격상 목자이다. 목사는 양떼의 한가운데 서 있다. 모든 것이 그를 중심축으로 하여 돌아간다. 목사에게는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양떼들이 영적인 건강과 축복을 오래도록 누리게 하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관계가 전부다”라는 말을 모토로 삼는다. 목사는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와 서로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관계적인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돕는다.

2) 선지자 : 선지자는 양떼보다 언덕 하나는 넘어서 5마일 정도를 앞서 가서 망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한 것을 본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더 관심이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에게서 듣고 목사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와 선지자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해 왔다. 목사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원하기 때문에 현상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의 관점에서 섬긴다. 그러나 선지자는 모든 것에 대해 의문 부호를 달고 선지자적 관점을 가지고 섬긴다.

3) 사도 : 사도는 선지자처럼 다음 언덕 저편으로 넘어가는 대신 3마일 정도 떨어진 언덕 꼭대기에 서서 큰 그림을 볼 수 있으며 다음 초장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다. 그의 핵심 단어는 ‘전략’이며 그의 핵심 사역은 ‘선교’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이 모든 민족들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보기 원한다. 사도는 군대의 장군과 아주 비슷하다. 사도는 모든 민족의 구원이라는 대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책임을 이루기 위해 애를 쓴다. 사도는 교회를 개척하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고 사막 같은 복음의 불모지에 샘을 만든다. 여러 면에서 사도는 다른 모든 사역을 통합시킨다. 사도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은 해결사로, 달란트 발굴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교회 배가 운동을 위한 초자연적인 토대와 기초를 세운다거나,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거나, 환상이나 초자연적인 계시에 대해 전략적으로 반응하는 일, 다른 4가지 사역들을 창조적으로 하나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4) 교사 : 교사는 양떼와 반마일 정도의 가까운 곳에 앉아 못된 짓을 하는 양이나 풀을 뜯다가 자기도 모르게 양떼에서 이탈하는 양을 다시금 양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는 ‘진리, 오직 진리’만을 모토로 삼는다. 교사는 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는 세부적인 것을 좋아하고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아는 주석가 역할을 하며 가르침자체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한다. 그는 강의노트를 남기기보다 그의 정신을 남긴다.

5) 전도자 : 전도자 역시 양떼로부터 반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전도자는 3가지 목표와 열정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발견하고, 또 발견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는 외부인들에게 건전한 교회 상을 소개하고, 복음을 그들에게 읽어 줌으로, 그들에게 전도를 함으로 새로운 신자들이 성숙함에 이르도록 훈련시키는 일에 참여한다.

  위에서 열거한 다섯 가지의 사역들은 하나하나가 귀하고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사역들은 조화와 협력을 통해 서로 보완할 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서로가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또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의 친구가 될 때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볼프강 짐존,  가정 교회, 황진기 옮김 (국제제자훈련원 2004), p. 182-186.)

  하나님께 부름받은 예배 인도자는 자신의 인도자 됨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인도를 받아서 예배를 해야 한다. 바깥 뜰에서 안 뜰로, 그리고 지성소로 인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어 사람들을 이렇게 인도하게 하셨다.

Ⅳ. 예배를 드리는 방법

  예배에 들어가는 첫째 방법은 인간 주도적인 모든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적으로 고요한 가운데 듣는 생활을 함으로써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로서 나오도록 해야 한다. 프랑수와 페네롱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실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창조주의 손에 맡기며, 무슨 일에든지 ‘주님,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십니까?’라는 말을 하루에 백 번이라도 중단 없이 말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Francois Fenelon, Christian Perfection(Minneapolis : Bethany Fellowship, 1975), p. 4.)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가 예수님의 인도와 지배 아래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하게 된다. 성령의 행동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도록 육신의 행동을 멈추는 것은 공중 예배에 영향을 끼치고 공중 예배를 활기차게 한다. 때로는 그와 같은 일은 완전한 침묵의 방식을 취한다. 산만한 마음과 혀에 가득한 말을가지고 영원하신 그분의 임재 앞에 나아가기보다 경외하는 마음과 침묵으로 나아가는 편이 훨씬 더 적합한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2:20).
  파더 암모나스(Father Ammona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고요함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그 고요함의 능력이 얼마나 철저히 치유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말입니다. …… 성도들은 고요함에 의하여 성장합니다. ……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에게 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Thomas Merton, Contemplative Prayer(Garden City, NY : Doubleday, 1969), p.42.)

  찬양은 예배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촉구한다.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구약은 소와 양의 제물을 요구하였다. 신약은 찬미의 제사를 요구하고 있다. 바울과 실라는 찬양의 노래로 빌립보 감옥을 가득 채웠다(행16:25).

  20세기에 있어서 찬양에 가장 큰 활력을 불어 넣은 것은 은사 운동이었다. 한국에서는 예수 전도단과 온누리 교회의 경배와 찬양 운동을 통해서 청년들에게 새 생명과 활기를 불어 넣으셨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우리가 예배를 하는 데 찬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크게 각성하고 있다. 19세기 초 슐라이허마허 이후 ‘말씀의 신학’,  ‘경험론’, '행동적‘방법론을 넘어 1990년대 이후는 ’예술학적‘ 방법론으로 전환의 흐름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에서도 슐라이허마허를 비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가 강조한 ’감정‘의 패러다임이 신앙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목회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창조적 예배 모범을 개발하여 왔다. 
  그의 전망대로 2000년대의 한국 교회는 경배와 찬양, 워십 댄싱 등 예술과 감정 분야에서 많은 진전과 함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이들이 음악과 댄스에 열광하였고 이것을 신앙 안에서 잘 소화한 교회들은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황성철, 총신 실천 신학의 회고와 미래의 전망, 신학지남 270(2002봄), 278-302. )우리는 CCM과 같은 ‘가벼운 음악’ 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같은 ‘무거운 음악’ 으로도 영감의 깊은 부분을 체험하도록 해야 한다. 음악을 하는 성가대나 찬양 사역자들은 그들의 음악적인 기교뿐만 아니라 영성도 함께 자라나야 한다. 음악을 통해서 나타나는 영성은 결국 찬양 인도자의 영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 대한 신앙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찬양 인도자가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든지, 단순한 곡을 반복함으로 지루하게 한다든지, 악기 사용이 너무 기교적으로 나가는 것 등은 지양해야 한다. 또한 참석자들을 억지로 동참시키려고 애쓰다 보면 감정이 상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CCM이 부활 찬양이 주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 십자가와 회개가 있어야 한다. 찬양곡의 선정도 새로운 곡과 잘 알고 있는 곡을 잘 배열함으로 모두가 동참할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찬양을 통하여 우리는 예배 행위에 우리의 감정을 전적으로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뇌로만 드리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가 아니다. 감정은 인격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예배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예배가 이성의 기능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이성의 기능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바울이 권면한 것과 같이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영으로 찬양하고 또 마음으로 찬양해야 한다(고전14:15). 노래는 우리로 하여금 찬양을 하도록 돕는다. 또한 감정 표현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음악을 통하여 우리는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다. 노래가 정신 집중이 된 상태로 이루어지면,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즉 우리들은 집중하게 된다. 우리의 분산된 마음과 영이 하나로 통합되어 흐른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자세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가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해서 공부하고 예배 형식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결국 우리는 예배를 함으로써 예배를 배워야 한다. 예배를 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간단한 조치를 살펴 보자.

  첫째,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시간을 가지라. 실제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바울의 말을 따르도록 노력하자. 매순간 찬양, 경배, 감사를 속으로 이야기 하자. 마음으로 예배하고, 자백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내주하시는 나의 스승되신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자. 이 모든 것은 공적 예배에 대한 기대를 높여 줄 것이다. 모여 예배드리는 것은 단지 내가 한 주 내내 노력해 오던 일의 연장과 심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째, 다양한 예배 경험을 가지라. 혼자 있을 때 예배하자. 성경 공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를 위해서 가정에서 그룹으로 모이기를 힘쓰자. 두세 명의 작은 그룹으로 모여서 찬양의 제사를 드리자. 큰 규모로 모였을 때는 불가능하지만 작은 규모로 모였을 때는 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다. 이작은 경험들은 모두 다 주일의 큰 모임을 능력 있게 하고 영향을 준다. (왜?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험하는 일 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 성도의 교제가 충분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모인 예배의 경험을 준비할 수 있는 길을 찾으라. 토요일 저녁에 일찍 잠자리에 든다든지, 자성과 자백의 내적 시간을 갖는다든지, 주일에 사용될 찬송가와 성구를 찾아본다든지, 일찍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한다든지, 예배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 청소와 정리를 한다든지, 성도들을 심방하여 초청한다든지, 진정으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마음을 산만케 하는 일들을 좇아 버리는 일 등을 하자.

  넷째, 주님의 능력으로 기꺼이 모이려고 하자.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학교나 직장이나 가정에서 당한 일을 주님께 가지고 나와서 회개하고 치유되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 새 힘을 덧입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풍성히 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건주의의 영향이 개인주의에 빠지도록 했던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개인의 일, 나의 관심사, 나의 축복, 나의 말씀 듣기 등 “나의 것”에 매이는 마음을 버리자. 우리는 나를 넘어서 이웃, 사회를 품어야 한다. 모인 예배의 언어는 “나”가 아니라 “우리”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복종이 있다.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교제 안에서 서로를 향한 복종이 있다. 거기에 개인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바람이 있다. 만일 나에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공동체 전체나 어떤 사람에게 임해야한다.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거룩한 의존을 발전시키라. 거룩한 의존이란 중요한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악이 약화되고 선이 흥왕하기 위한 내적 산고가 따른다.

  여섯째, 주의를 산만케 하는 것들을 감사로 흡수해 버리라. 소음이나 산만케 하는 것이 있을 경우 신경질을 부리거나 소란을 피우지 말고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우라. 우리는 아이들이 예배에 오기 전에 가정에서 정숙을 배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가르치고 조용하게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해서 주일학교가 있고 어린이 예배가 있다. 거기에 참석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때 아이들이 어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흥미를 잃고 산만해지기 쉽다. 그때는 그릴 것을 준다든지,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준다든지 하여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설령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그들을 축복하라. 그들의 발랄함과 에너지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주의를 산만케 하는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가지라.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일곱째, 예배드리는 법을 익히라. 많은 경우 예배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실망스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진정한 예배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식이 매우 낮을 수도 있다. 예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예배에 가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이작 페닝톤(Isaac Pennington)은 사람들이 진정한 예배를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활활 타올라 서로를 뜨겁게 하는 석탄 더미 같아서, 큰 힘과 신선함과 생명의 활력이 모든 사람에게 흘러 든다”고 말한다. 장작 한 개비 혼자서는 오랫동안 탈 수 없다. 그러나 장작개비들이 많이 모였을 때는 비록 연약한 것들일지라도 큰 불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내키지 않더라도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이제까지 예배가 무미건조하여 실망스러웠을지라도 참석해야 한다. 기도하면서 참석하고, 기대하면서 참석하고, 하나님께서 새롭고 생명력있는 일을 우리 가운데 행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참석해야 한다.

Ⅴ. 예배의 결과

  예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계되어서만 가능하다. 이 관계를 신학적으로 언약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이 언약 관계의 회복에 그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언약의 관계의 회복은 오늘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아는 일 즉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예배의 모든 요소들(기도, 찬양, 말씀 선포, 봉헌, 교제 등)이 이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또한 예배자들로 하여금 이 일에 하나님의 백성이 집중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지, 또한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앎이 이루어질 때, 감사와 회개가 있고, 하나님 앞에 헌신이 있게 된다. 따라서 예배의 훈련 결과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예배는 거룩한 기대 가운데 시작하는 것처럼, 거룩한 순종 가운데 끝난다. 만일 예배가 더 큰 순종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삼상15:22).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없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에 들어갈 때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마5:23,24).예배를 통하여 마음의 성소에 능력이 점점 더 들어오고, 그리고 영혼 속에 자비가 점점 더 자란다. 예배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거룩한 순종은 예배가 일종의 마취제가 되지 않도록 한다. 일종의 현세 도피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가 우리들로 하여금 봉사로의 부르심을 명백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게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진정한 예배는 우리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제도적인 차원에서 마귀의 세력과 싸우는 예수님의 싸움에 가담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사령관이다. 우리는 봉사를 위한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모든 일과 모든 방법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가꾸어 온 거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윌러드 스패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예배는 실제로 세심하고 훈련된 모험이다.”( Willlard Sperry, "Reality in Worship", in Fellowship of Saints ; An Anthology of Christian Devotional Literature, ed. Thomas S. Kepler (New York : Abingdon-Cokesbury Press, 1963), p.65.)

  예배는 소심한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안일한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예배는 성령에 의한 담대한 삶에 우리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다. 예배는 예배당의 모든 설비와 제사장과 의식을 근본적인 것으로 하지 않는다. 예배는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결론적으로 우리는 영적 침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음으로 사람들은 영적 소원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대를 깨우는 방법은 교회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의 회복을 통해서 가능하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겼다(요4:19-26).  사람들은 신령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된다. 우리는 예배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깊이 체험해야 한다. 예배의 훈련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친히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런 개별적인 인도는 공동체적인 인도를 낳아야 한다. “공동체적 인도”란 조직체적인 의미가 아니라 유기체적이고 기능적인 의미이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적극적이며 즉각적인 인도를 다 함께 아는 일이 있어야 한다. 예배는 사회적 행위이다. 공동체의 행위이다. 그리고 예배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행위이다.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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