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네티컷 교수가 된 이 예레미야 선교사 선교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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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인생소감
저는 1970년 수원에서 옷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곧 서울로 이사하여 저는 줄곧 서울에서 자라났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를 잘 해서 시험을 보면 거의 언제나 1등을 하였습니다. 또, 줄곧 반장을 하고 6학년 때는 전교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어린이날에 청와대로 초청되어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하였고, 중학교 2학년 어린이날 기념식에는 훌륭한 청소년 중의 한 명으로 뽑혀 세종문화회관에서 상 받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나중에 출세하면 자신을 꼭 기억해 달라는 농담을 자주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훗날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막연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듯이 , 한 편으로 저는 촉망받는 아이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을 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잃을까봐 항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제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섬겨 주었기 때문에, 저는 자기 중심적이고 남을 제대로 배려할 줄 몰랐습니다. 공부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또한 나를 이해해 주고 깊이 사랑해 줄 이성에 대한 목마름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한 여학생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한 사건은 제 인생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 성적은 곤두박질 쳤고 여러 사람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저를 정욕에 종노릇하게 만들었습니다. 밤마다 정욕적인 상상과 행위로 만족을 구하였고, 이런 자신을 미워하고 정죄하면서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결국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인생의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저는 일요일마다 집 근처에 있던 국민대에서 공부하였는데, 지금은 케냐에 계신 재키윤 선교사님께서 저를 성경공부에 초청해 주셨습니다. 재수생이지만 참석한 여름 수양회에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고자 결단하였습니다. 11월이 되자 재키 선교사님은 케냐로 파송되셨고, 저는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점점 자신을 컨트롤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입학시험 얼마 전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을 붙들고 서원 기도했습니다 “저를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시켜 주시면 제 인생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서원을 받으시고 오직 은혜로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시켜 주셨습니다.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았을 때,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제가 기뻤던 이유는 단지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자 다짐했습니다.
저의 성경선생님이셨던, 지금은 시카고에 계신, 심다니엘 선교사님께서는 제가 사49:6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말씀을 인생요절로 잡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또 성경공부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요일1:7b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이 제 심령에 크게 역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저를 깨끗게 하심을 믿었을 때, 저는 진정한 자유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다가 길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눈물 흘리곤 하였습니다.
2. 선교사로 부르신 하나님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관악 3부가 개척 나가자 저는 자원하여 개척에 동참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진심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쓰시기에는 많은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6개월쯤 훌륭한 학생목자처럼 열심히 일하고 나면 3개월쯤은 흉악한 죄인으로 돌변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말로 열심히 일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 다니며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봄바람이 불면서 저는 힘이 들었습니다. 슬금슬금 정욕이 찾아오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장막에 누어서 버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죄에 넘어간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막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없는데 즐기면서 살자”는 자포자기의 생각으로 온갖 죄악을 다 저질렀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포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저를 포기치 않으시고 심다니엘, 한나 선교사님들을 통해 회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저주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것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2.0이 안되던 대학원 1학년 성적을 만회하여 기적적으로 석사 졸업을 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하셨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동역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동교센터에서 새 출발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패잔병 같던 저를 예수님께서는 수양회에서 요21:15 말씀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제 안에 밀물처럼 몰려들어 왔고, 저는 “예수님, 왜 저를 사랑하십니까?” 묻고 또 물으며 혼자서 엉엉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변함 없이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6개월 일하면 3개월 침체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은혜에 기초해서 일을 하지만 6개월 간 무리를 하고 고 나면 은혜는 잊어버리고 힘이 들어서 쉬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부도가 나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적인 것 외에는 영적인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리해서 일 하지 않으면 힘들어 질 일도 없고 예수님을 떠날 일도 없으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은 악한 종과 같았습니다. 그러나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의 악한 방향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딸 예은이와 아들 요셉이를 주셨고, 동역자가 영적으로 크게 성숙했으며, 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졸업선물로 봄수양회에서 마태복음 6장을 기초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6:20a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는 예수님의 명령에 귀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면 비록 이 땅에서는 보상이 없을 지라도 하늘나라에 있는 제 통장의 잔액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상을 받으면 하늘나라에는 쌓이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편이 좋았습니다. 6개월이 아니라 6년, 혹은 60년을 일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하늘에 있는 제 통장의 잔액이 증가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10월에 서울대 수학과에서 국제학회가 있었는데, 학회 기간 중 미국 메디슨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의 교수님께서 저에게 한 학기 동안 메디슨에 오겠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희 가정은 두 달만에 아무 준비도 없이 미국에 단기 선교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나아가며 장기체류의 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참석하게 된 장례식이 끝난 후, 식당에서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 수학교수로 계신 헨리킴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식당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헨리 선교사님은 저와 김아브라함 선교사님 앞에 앉으셨고, 저는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의 소개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선교사님은 제게 토론토로 오겠냐고 물으셨는데, 미국에 온 지 보름도 안됐는데 또 어디 다른 곳에 가는 것은 잘 상상이 안되었습니다. 그냥 거의 빈말로 “좋다”고하였습니다.
메디슨에서의 삶은 저의 가정 모두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저는 한 과목을 가르쳤는데, 이를 위해 때마다 1시간 분량을 외어야만 했습니다. 동역자 에스더 선교사도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변화 환경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은이와 요셉이도 말이 통하지 않아 유치원에 가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토요일마다 밀워키에 가서 말씀공부하고 주일 예배 드린 후 돌아 왔습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영적인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김아브라함, 사라 선교사님들을 배우 수 있었습니다. 마치 특공훈련을 받는 것처럼 지내던 중, 하루는 기도하던 중에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죽으면 어떻게 될까’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겨우 구원은 얻겠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불 난 집에서 쫓겨 나온 사람처럼 아무 가진 것 없고 아무 할 말 없을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에 있는 제 통장의 잔액이 사실은 마이너스인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시간을 낭비하였던 것을 애통하게 회개하였습니다. 하늘나라 소망을 굳게 붙들고 시간을 아껴 하나님을 위해 일함으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고자 결단하였습니다. 1년 전 봄수양회에서 받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을 심령으로 깊이 깨닫고 부활신앙을 붙잡은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회개와 결단을 기뻐하셨습니다. 한국에 돌아 갈 날이 다가올 때, 헨리 선교사님은 제가 3년 간 박사 후 연구원으로 안정적으로 캐나다에 와 있을 수 있도록 초청해 주셨습니다. 저희 가정은 잠시 본국에 입국한 후, 캐나다로 재파송 되었습니다.
3. 캐나다 선교보고
첫째, 도전할 때 승리를 주신 하나님. 200년 7월 2일 캐나다 땅을 밟은 저는 여전히 선교사로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2년간은 양을 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2년간은 주로 적응하고 언어를 정복하며 지낸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헨리 선교사님은 한 달쯤 지난 후부터 저와 같이 fishing을 나가시며 제가 도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두 달이 지났을 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Wenbin Tao라는 중국 학생이 1:1 성경공부에 온 것입니다. 저는 한 번이겠거니 했는데, 이 형제는 계속해서 1년간이나 꾸준히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도전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매주 셩경공부 노트를 준비하며 자립적인 영어 성경선생으로 기초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포기치 않고 꾸준히 할 때 축복하신 하나님. 2003년을 시작하며 저의 기도제목 중 하나는 3팀 1:1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길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fishing했지만, 양들은 무관심하였습니다. 저는 Tao형제가 성경공부에 오니 그냥 만족하고 fishing을 그만 두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헨리 선교사님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분은 혼자 7팀씩 1:1을 하면서도 거의 매일 fishing하셨습니다. 학기초에는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씩fishing하셨습니다. 저는 요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말씀 앞에 회개하고 포기치 않고 계속 fishing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Brian Niemann형제를 보내 주셨고, 새 학기가 되자 Stephen McFarlane, Ahmad, Kamal, Timur Urakov, Jonathan Wilbiks 형제들을 보내 주셔서 저는 5팀 1:1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가을에는 양들이 좀 떨어져 나가고 아무리 fishing을 해도 성경공부에 오는 양들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Ahmad, Timur, Jonathan 형제들이 말씀공부에 왔기 때문에, 저는 이 양들만 잘 감당하고 자 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선교사님은 제가 끊임없이 fishing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 가운데 Jordan Myslik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리학 교수가 꿈인 이 형제는 말씀 공부뿐만 아니라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제자후보로 성장하여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셋째, 오병이어를 축복하신 하나님. 동역자 에스더 선교사는 역사를 섬기면서 요셉이가 유치원에 가는 두 시간 반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는 오병이어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에스더 선교사가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드려, 에스더 선교사는 날마다 캠퍼스에 나가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놀랍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니퍼, 프라치, 라헬레 자매들이 꾸준히 성경공부에 왔고, 계속해서 예샤, 미뒹 자매들을 만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2004년 여름에는 일본에서 영어를 공부하러 온 Maki자매를 만나 섬겼는데, 이 자매는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였고, 일본으로 돌아가 Sarah Nioji목자와 계속 성경공부 하였습니다. 작년 가을부터는 파와, 바네사, 실라 자매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들 모두 다 부활 절 수양회에 참석하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들 중 파와와 실라 자매가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제자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넷째, hard working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 대학의 많은 교수들이 조교수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지만, 정년을 보장 받게되면, 연구활동에 좀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헨리 선교사님은 토론토 대학으로 오실 때, 이미 정년을 보장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아침 8시 반이면 학교에 오셔서 오후 5시까지 일하시고, 저녁 식사 후 다시 학교에 오셔서 밤늦게까지 일하십니다. 토요일에는 말씀 준비 때문에 몇 시간 더 일하십니다. 무엇보다 이 일을 365일 변함없이 하십니다. 세계최고 수준의 학자가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열심히 일하는 것임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꾸준히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한 실력이었습니다. 헨리 선교사님은 학교에서 제 책임교수이셨기 때문에 저는 자연스럽게 이 분이 하는 일을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학교에 와선 비슷한 시간에 집에 가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저도 꾸준히 일하는 것을 몸에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단조로워 보이지만 열매 맺는 유일한 비결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제 연구에 필요한 열매들을 주셔서, 저는 새로운 주제를 기지고 헨리 선교사님과 공동으로 논문을 쓸 수 있었고, 앞으로의 장기적인 연구계획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초청 받아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다른 수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4. 코네티컷 대학 개척의 종으로
토론토 대학에서의 3년 계약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교수직을 얻고자 작년 가을부터 준비해서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약 140개의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디로 가게 될지 아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게 되면 제 인생은 공중분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자신을 바라보면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제가 미국 박사들보다 유리할 리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방향만 주시면 어디라도 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믿음이 부족해서 신경성 소화불량에 걸리고 살이 점점 빠지더니 10kg이나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학회참석을 위해 시카고에 갔다가 저의 목자님이셨던 심다니엘, 한나 선교사님들을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심다니엘 선교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시면 안되니까 일생 120명 제자를 세우겠다는 서원기도를 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저는 농담으로 여기고 그냥 웃었습니다. 토론토로 돌아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분명한 결단과 방향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20명은 도저히 믿음이 안되어서 좀 줄여서 서원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교수직을 주시면 일생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우고 100명의 제자를 세우겠습니다." 동역자 에스더 선교사도 하나님의 방향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가정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저의 서원을 받아 주셨습니다. 140여 개의 대학 중에서 오직 한 대학이 저를 최종 인터뷰에 초청하였고, 바로 그 대학에서 저를 채용하겠다든 연락이 왔습니다. 그 곳은 바로 코네티컷 대학이었습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코네티컷 대학은 미국 동부의 뉴욕 주와 메사추세츠 주 사이에 있는 코네티컷 주의 주립 대학으로서, 학생 수는 총 2만 7천 명이고 캠퍼스는 넓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저희 가정이 이 대학을 개척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저희 가정이 이 하나님의 방향에 충성스럽게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University of Connecticut 줄여서 UConn UBF의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양들이 와서 풍성한 꼴을 얻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한 명의 아브라함과 한 명의 사라를 보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15년 내에 150 명 예배를 이루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1970년 수원에서 옷 장사를 하시던 부모님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은 곧 서울로 이사하여 저는 줄곧 서울에서 자라났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공부를 잘 해서 시험을 보면 거의 언제나 1등을 하였습니다. 또, 줄곧 반장을 하고 6학년 때는 전교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어린이날에 청와대로 초청되어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하였고, 중학교 2학년 어린이날 기념식에는 훌륭한 청소년 중의 한 명으로 뽑혀 세종문화회관에서 상 받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나중에 출세하면 자신을 꼭 기억해 달라는 농담을 자주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훗날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막연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듯이 , 한 편으로 저는 촉망받는 아이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을 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잃을까봐 항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피곤한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제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희생하고 섬겨 주었기 때문에, 저는 자기 중심적이고 남을 제대로 배려할 줄 몰랐습니다. 공부하며 받는 스트레스는 또한 나를 이해해 주고 깊이 사랑해 줄 이성에 대한 목마름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만난 한 여학생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한 사건은 제 인생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 성적은 곤두박질 쳤고 여러 사람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주는 압박감은 저를 정욕에 종노릇하게 만들었습니다. 밤마다 정욕적인 상상과 행위로 만족을 구하였고, 이런 자신을 미워하고 정죄하면서도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결국 대학입시에 낙방하고 인생의 커다란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재수를 시작하면서 저는 일요일마다 집 근처에 있던 국민대에서 공부하였는데, 지금은 케냐에 계신 재키윤 선교사님께서 저를 성경공부에 초청해 주셨습니다. 재수생이지만 참석한 여름 수양회에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고자 결단하였습니다. 11월이 되자 재키 선교사님은 케냐로 파송되셨고, 저는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점점 자신을 컨트롤 할 수 가 없었습니다. 입학시험 얼마 전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을 붙들고 서원 기도했습니다 “저를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시켜 주시면 제 인생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서원을 받으시고 오직 은혜로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시켜 주셨습니다.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찾았을 때,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제가 기뻤던 이유는 단지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바쳐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자 다짐했습니다.
저의 성경선생님이셨던, 지금은 시카고에 계신, 심다니엘 선교사님께서는 제가 사49:6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말씀을 인생요절로 잡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또 성경공부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요일1:7b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이 제 심령에 크게 역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저를 깨끗게 하심을 믿었을 때, 저는 진정한 자유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다가 길거리에서 버스 안에서 눈물 흘리곤 하였습니다.
2. 선교사로 부르신 하나님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관악 3부가 개척 나가자 저는 자원하여 개척에 동참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진심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쓰시기에는 많은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6개월쯤 훌륭한 학생목자처럼 열심히 일하고 나면 3개월쯤은 흉악한 죄인으로 돌변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말로 열심히 일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뛰어 다니며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봄바람이 불면서 저는 힘이 들었습니다. 슬금슬금 정욕이 찾아오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장막에 누어서 버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죄에 넘어간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장막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 없는데 즐기면서 살자”는 자포자기의 생각으로 온갖 죄악을 다 저질렀습니다. 저도 제 자신을 포기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저를 포기치 않으시고 심다니엘, 한나 선교사님들을 통해 회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저를 저주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제게 보여 주신 것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2.0이 안되던 대학원 1학년 성적을 만회하여 기적적으로 석사 졸업을 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하셨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동역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동교센터에서 새 출발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패잔병 같던 저를 예수님께서는 수양회에서 요21:15 말씀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제 안에 밀물처럼 몰려들어 왔고, 저는 “예수님, 왜 저를 사랑하십니까?” 묻고 또 물으며 혼자서 엉엉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가 잘할 때나 못할 때나 변함 없이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6개월 일하면 3개월 침체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은혜에 기초해서 일을 하지만 6개월 간 무리를 하고 고 나면 은혜는 잊어버리고 힘이 들어서 쉬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부도가 나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적인 것 외에는 영적인 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리해서 일 하지 않으면 힘들어 질 일도 없고 예수님을 떠날 일도 없으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 달란트를 땅에 파묻은 악한 종과 같았습니다. 그러나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의 악한 방향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딸 예은이와 아들 요셉이를 주셨고, 동역자가 영적으로 크게 성숙했으며, 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졸업선물로 봄수양회에서 마태복음 6장을 기초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6:20a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는 예수님의 명령에 귀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면 비록 이 땅에서는 보상이 없을 지라도 하늘나라에 있는 제 통장의 잔액이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 상을 받으면 하늘나라에는 쌓이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편이 좋았습니다. 6개월이 아니라 6년, 혹은 60년을 일해도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하늘에 있는 제 통장의 잔액이 증가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10월에 서울대 수학과에서 국제학회가 있었는데, 학회 기간 중 미국 메디슨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의 교수님께서 저에게 한 학기 동안 메디슨에 오겠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희 가정은 두 달만에 아무 준비도 없이 미국에 단기 선교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나아가며 장기체류의 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 이사무엘 선교사님이 소천하셨습니다. 참석하게 된 장례식이 끝난 후, 식당에서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 수학교수로 계신 헨리킴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식당에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헨리 선교사님은 저와 김아브라함 선교사님 앞에 앉으셨고, 저는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의 소개로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선교사님은 제게 토론토로 오겠냐고 물으셨는데, 미국에 온 지 보름도 안됐는데 또 어디 다른 곳에 가는 것은 잘 상상이 안되었습니다. 그냥 거의 빈말로 “좋다”고하였습니다.
메디슨에서의 삶은 저의 가정 모두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저는 한 과목을 가르쳤는데, 이를 위해 때마다 1시간 분량을 외어야만 했습니다. 동역자 에스더 선교사도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변화 환경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은이와 요셉이도 말이 통하지 않아 유치원에 가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토요일마다 밀워키에 가서 말씀공부하고 주일 예배 드린 후 돌아 왔습니다. 힘든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 영적인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김아브라함, 사라 선교사님들을 배우 수 있었습니다. 마치 특공훈련을 받는 것처럼 지내던 중, 하루는 기도하던 중에 ‘이러다 내가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죽으면 어떻게 될까’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겨우 구원은 얻겠지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불 난 집에서 쫓겨 나온 사람처럼 아무 가진 것 없고 아무 할 말 없을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에 있는 제 통장의 잔액이 사실은 마이너스인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과 시간을 낭비하였던 것을 애통하게 회개하였습니다. 하늘나라 소망을 굳게 붙들고 시간을 아껴 하나님을 위해 일함으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고자 결단하였습니다. 1년 전 봄수양회에서 받은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을 심령으로 깊이 깨닫고 부활신앙을 붙잡은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회개와 결단을 기뻐하셨습니다. 한국에 돌아 갈 날이 다가올 때, 헨리 선교사님은 제가 3년 간 박사 후 연구원으로 안정적으로 캐나다에 와 있을 수 있도록 초청해 주셨습니다. 저희 가정은 잠시 본국에 입국한 후, 캐나다로 재파송 되었습니다.
3. 캐나다 선교보고
첫째, 도전할 때 승리를 주신 하나님. 200년 7월 2일 캐나다 땅을 밟은 저는 여전히 선교사로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2년간은 양을 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2년간은 주로 적응하고 언어를 정복하며 지낸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헨리 선교사님은 한 달쯤 지난 후부터 저와 같이 fishing을 나가시며 제가 도전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두 달이 지났을 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Wenbin Tao라는 중국 학생이 1:1 성경공부에 온 것입니다. 저는 한 번이겠거니 했는데, 이 형제는 계속해서 1년간이나 꾸준히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고 도전할 때 승리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매주 셩경공부 노트를 준비하며 자립적인 영어 성경선생으로 기초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포기치 않고 꾸준히 할 때 축복하신 하나님. 2003년을 시작하며 저의 기도제목 중 하나는 3팀 1:1이었습니다. 눈이 쌓인 길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fishing했지만, 양들은 무관심하였습니다. 저는 Tao형제가 성경공부에 오니 그냥 만족하고 fishing을 그만 두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헨리 선교사님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 분은 혼자 7팀씩 1:1을 하면서도 거의 매일 fishing하셨습니다. 학기초에는 날마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씩fishing하셨습니다. 저는 요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말씀 앞에 회개하고 포기치 않고 계속 fishing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Brian Niemann형제를 보내 주셨고, 새 학기가 되자 Stephen McFarlane, Ahmad, Kamal, Timur Urakov, Jonathan Wilbiks 형제들을 보내 주셔서 저는 5팀 1:1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가을에는 양들이 좀 떨어져 나가고 아무리 fishing을 해도 성경공부에 오는 양들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Ahmad, Timur, Jonathan 형제들이 말씀공부에 왔기 때문에, 저는 이 양들만 잘 감당하고 자 했습니다. 그러나, 헨리 선교사님은 제가 끊임없이 fishing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이 가운데 Jordan Myslik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리학 교수가 꿈인 이 형제는 말씀 공부뿐만 아니라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제자후보로 성장하여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셋째, 오병이어를 축복하신 하나님. 동역자 에스더 선교사는 역사를 섬기면서 요셉이가 유치원에 가는 두 시간 반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결단하였습니다. 이는 오병이어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에스더 선교사가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을 드려, 에스더 선교사는 날마다 캠퍼스에 나가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받으시고 놀랍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니퍼, 프라치, 라헬레 자매들이 꾸준히 성경공부에 왔고, 계속해서 예샤, 미뒹 자매들을 만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2004년 여름에는 일본에서 영어를 공부하러 온 Maki자매를 만나 섬겼는데, 이 자매는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였고, 일본으로 돌아가 Sarah Nioji목자와 계속 성경공부 하였습니다. 작년 가을부터는 파와, 바네사, 실라 자매들에게도 성경을 가르쳤는데, 이들 모두 다 부활 절 수양회에 참석하는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들 중 파와와 실라 자매가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제자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넷째, hard working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 대학의 많은 교수들이 조교수 시절에는 열심히 일하지만, 정년을 보장 받게되면, 연구활동에 좀 게을러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헨리 선교사님은 토론토 대학으로 오실 때, 이미 정년을 보장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아침 8시 반이면 학교에 오셔서 오후 5시까지 일하시고, 저녁 식사 후 다시 학교에 오셔서 밤늦게까지 일하십니다. 토요일에는 말씀 준비 때문에 몇 시간 더 일하십니다. 무엇보다 이 일을 365일 변함없이 하십니다. 세계최고 수준의 학자가 되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열심히 일하는 것임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꾸준히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요 진정한 실력이었습니다. 헨리 선교사님은 학교에서 제 책임교수이셨기 때문에 저는 자연스럽게 이 분이 하는 일을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학교에 와선 비슷한 시간에 집에 가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저도 꾸준히 일하는 것을 몸에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단조로워 보이지만 열매 맺는 유일한 비결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제 연구에 필요한 열매들을 주셔서, 저는 새로운 주제를 기지고 헨리 선교사님과 공동으로 논문을 쓸 수 있었고, 앞으로의 장기적인 연구계획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초청 받아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다른 수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4. 코네티컷 대학 개척의 종으로
토론토 대학에서의 3년 계약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교수직을 얻고자 작년 가을부터 준비해서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약 140개의 대학에 지원서를 넣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디로 가게 될지 아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갈 곳이 없게 되면 제 인생은 공중분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자신을 바라보면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제가 미국 박사들보다 유리할 리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방향만 주시면 어디라도 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했지만 믿음이 부족해서 신경성 소화불량에 걸리고 살이 점점 빠지더니 10kg이나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학회참석을 위해 시카고에 갔다가 저의 목자님이셨던 심다니엘, 한나 선교사님들을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심다니엘 선교사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손해를 보시면 안되니까 일생 120명 제자를 세우겠다는 서원기도를 하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저는 농담으로 여기고 그냥 웃었습니다. 토론토로 돌아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분명한 결단과 방향이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20명은 도저히 믿음이 안되어서 좀 줄여서 서원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교수직을 주시면 일생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우고 100명의 제자를 세우겠습니다." 동역자 에스더 선교사도 하나님의 방향을 구하며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저의 가정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저의 서원을 받아 주셨습니다. 140여 개의 대학 중에서 오직 한 대학이 저를 최종 인터뷰에 초청하였고, 바로 그 대학에서 저를 채용하겠다든 연락이 왔습니다. 그 곳은 바로 코네티컷 대학이었습니다. 저희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코네티컷 대학은 미국 동부의 뉴욕 주와 메사추세츠 주 사이에 있는 코네티컷 주의 주립 대학으로서, 학생 수는 총 2만 7천 명이고 캠퍼스는 넓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저희 가정이 이 대학을 개척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저희 가정이 이 하나님의 방향에 충성스럽게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University of Connecticut 줄여서 UConn UBF의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양들이 와서 풍성한 꼴을 얻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한 명의 아브라함과 한 명의 사라를 보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15년 내에 150 명 예배를 이루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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