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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여름수양회 메시지(마태복음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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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1회 작성일 16-07-3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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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주제2강
마태복음 28:1-20
마태복음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안녕하십니까. 드디어 저의 차례가 왔습니다. 저는 성균관대학교에서 학부,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는데 그동안 한번도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학문에 대한 갈급함이, 졸업식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으로 채워져버릴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오대산의 정기를 머금은 375km의 남한강. 이 정취에 푹 빠져서 말씀 전하는 것을 잊을까 염려하여,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달해 드리기 전에는 남한강 근처에 가지 않겠다, 다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남한강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말씀강사님들의 투쟁을 기뻐 받으시고, 이분들을 통하여 굽이굽이 힘차게 흐르는 말씀의 강물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셨음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1.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시다.
  우리가 있는 지역이 어디죠? 충주. 충주가 있는 대한민국 서쪽에는 어떤 나라가 있죠? 예 중국이 있습니다. 더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오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나옵니다. 그 사이에 지중해를 서쪽에 끼고 있는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인데, 그녀가 살던 곳이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서쪽에 있는 막달라 라는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막달라의 마리아, 즉 막달라 마리아라고 불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 귀신도 아닌 일곱 귀신에 씌여있었습니다(눅8:2). ‘으허허허허허’ 성경에 기록된,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 한 소년이 불과 물에 자주 넘어지고 심히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귀신들린 사람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상업의 중심지인 부유한 막달라의 음지에서 귀신들린 그녀는 정신병과 광기,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이교도들이 판을 치고 사람들은 무관심했으며 사람으로써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이 그녀를 더욱 어둠으로 내몰았습니다. 미칠대로 미쳐버린 막달라마리아. 그런 그녀에게도 다가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그녀에게 임했을 때 일곱 귀신이 쫓김을 당하고 영혼이 해방되며 드디어 그녀의 온전한 정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주받은 삶에서 구원받은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은 그녀의 유일한 빛 이자 구원자 였습니다. 그후로 그녀의 생명은 주님과 연결되어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으며,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랐습니다(눅 8:1-3).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11:9).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보고 들었던 시간들이 그녀에게는 생애 최고의 순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나의 메시야가 눈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고 있습니다(눅 23:27).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쿵. 쿵. 쿵.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내가 믿었던 메시야는 골고다에서 패하고 비통의 왕으로 십자가에서 죽어갔습니다(요 19:25, 마 27:56). 예수님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다. 이제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몸에 향품이라도 발라드릴 수 있을까(눅 23:56)?
  유대 장례법은 죽으면 바로 장사를 하지만 주님이 돌아가신 그 날 저녁부터가 안식일 이었기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끝난 새벽에 예수님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무덤은 무덤의 입구가 낮은 쪽에 있고 무덤을 막을 원반모양의 돌이 높은 쪽에 있었습니다. 시체를 안장하고 돌을 고정하고 있는 지지대를 빼버리면 돌이 굴러 내려가기 떄문에 매우 쉽게 무덤 입구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돌을 위쪽방향으로 굴려야 하기 때문에 장정 몇 명 들로도 하기 힘든 일 이었습니다. 하물며 다른 마리아가 함께 간다고 해도 불가능 한 일이었습니다. 이 새벽에 누군가가 도와줄리 만무하였지만, 그래도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무덤으로 향했습니다(1). 그 때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습니다. 마치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2,3). 심히 두려워하고 떨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5) 마리아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비통의 왕이 되어버린 나의 메시야, 그분의 시체를 찾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녀에게 들려온 천사의 다음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같이 6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이게 무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덤안을 살펴보아도 빈무덤 뿐이었습니다. 시체도 없었습니다(요 20). 천사가 전한 소식은 그녀를, 예수님의 십자자가 사건, 그 이전의 시간으로 데려갔습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막4:14).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셨다. 그녀의 이러한 고백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였습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7) 기가막힌 사실, 천사를 본것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꺼져가는 심지가 다시 타오르듯이, 그녀들의 마음이 뜨거워 지고 희망이 차올랐습니다. 마리아는 더이상 무덤에 머무를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소망이 생긴 그녀들은 이 소식을 들고 빨리 제자들에게로 달음질 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녀들을 지체하게 만든 분이 누구입니까? ‘평안하냐’ 평안을 선물로 주시는 예수님 이셨습니다(9). 시체를 찾으러 왔던 그녀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뒷걸음칠 여유따위는 없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달려가 그 발을 붙잡았습니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 왔습니다. 흐르는 피의 온도를 느꼈을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시야, 죽음 마저 굴복시키는 승리의 왕이시여.
  과거 일곱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죽음의 때조차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새벽같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그녀를 부활의 첫 증인이요, 제자중의 제자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2.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많은 증인과 증거들이 있다.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예수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이 천지가 개벽할 일을 말이야 어디서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선동하고 다녀! 예수, 죽어버려!’ 갖은 술수와 음모로 그들은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예수가 완전히 죽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무덤에 장사되는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잘 풀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한 가지, 걱정이 가시지 아니했는데, 그것은 예수가 평소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일입니다. ‘뭐, 이런 얼토당토 않는 말을! 그런데 이 무식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놓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또 선동하는거 아냐?’ 그들은 서로 의논한 후 빌라도를 찾아가 그 무덤을 지켜 결코 이 같은 일이 나중에 발생하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해 달라고 건의했습니다. 빌라도는 너희의 경비병으로 굳게 지키라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막강한 자들을 경비병으로 선발하여 그들과 무덤에 올라갔습니다. 그 무덤을 굳게 지키라고 경비병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인용이 찍힌 봉합지를,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 위에 붙였습니다. 아무라도 허락 없이는 그 돌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이 무덤을 지키는 자들도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그들은 불과 사흘전만 해도 예수님을 향해서 침뱉고 뺨을 때리고 희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무소 불위의 권력자들 같았습니다. 그런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시나무 떨듯 벌벌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워 떨었던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비병들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들이 된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경비병 중 몇이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즉, 부활의 증인은 한 명도 아니고 몇명이나 되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습니다. 그 뒷일은 우리가 잘 처리해 줄 것이라면서 돈을 건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결국 탄로나는 법입니다. 군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모두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같이 그들의 말을 곱씹어 봅시다. 흠, 로마군에서도 허가하여 무덤을 지키라 했는데 시체를 빼앗겼어. 그런데 저 경비병들은 왜 안죽고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흠, 그들이  잠들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어. 정말 자고 있었다면 아니, 예수의 제자들이 훔쳐 갔는지, 다른 누가 훔쳐 갔는지 어떻게 알아? 왜 경비병 씩이나 되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는 동안 잡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던거야? 진실은 결국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진실, 즉,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말하고 다녔다는 이 말이 오늘날 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져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위증한 그들이 도리어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공자의 묘는 곡부에 있고, 러시아의 레닌의 묘는 붉은 광장 지하에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은 금수산 기념 궁전에 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지 시신은 전남 곡성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분명히 시체를 안치고 도저희 쉽게 열 수 없는 돌로 무덤을 막았으며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보았고 경비병들이 보았습니다. 빈 무덤은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심지어 부활한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있습니다. 경비병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있습니다(눅24:34; 고전15: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가 있습니다(눅24:13-15). 도마와 열 사도가 있습니다(눅24:33-43; 요20:20-24). 열한 사도가 있습니다(마28:16-17; 눅24:50-51; 요20:26). 일곱 사도가 있습니다(요21:1-2), 오백여 형제가 있습니다(고전15:4,6). 야고보(고전15:7)와 바울(행9:3-6; 22:17-19; 23:11; 고전15:8)과 순교자 스데반(행7:55)고 사도 요한(계1:9-10) 이있습니다. 교회의 첨탑에는 십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왜 예수님의 형상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갖힌 분이 아니신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3일만에 부활하셔서 치욕과 고통,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구원의 상징, 새 생명의 상징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교회의 십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스마트폰의 악세사리와 여성들의 목걸이에 있는 십자가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기원 전, 기원후. Before Christ, 예수님이 오시기 전 과 , Anno Domini. 주님의 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의 분수령이고 원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인류의 역사가 그리스도 지향적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He is not here; he has risen, just as he said! 예 그렇습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만이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다.
  저의 유년시절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부모님께서는 퇴근하신 후에 하루도 빠짐 없이 센터역사를 섬기셨기 때문에 저는 외조부모님댁에 맡겨졌습니다. 목욕을 마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저의 궁둥짝을 짝 하고 때리셨습니다. 왜 때렸어? 물어보시는 할머니께, ‘이쁘다고~’ 라고 답하였습니다. 할머님께서는 손재주도 많으시고 생활력도 강하셔서 집안 살림을 이끄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정반대로 이런 능력이 없으셨고 점잖은 선비셨습니다. ‘극기’ 라는 한자어를 가지고 어린 저를 붙잡아두고 두시간을 강의를 하셨으니 어떤 분이신지 상상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몰랐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이제서야 천천히 밀려오곤 합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빨간색 베레모를 사주셨습니다. 모자를 쓰고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성동구 백화점에 가면, 가게 주인이며 행인이며 예쁘다며 난리가 났습니다. 그것이 좋으셨는지 모자를 잃어버렸는데 이번에는 비슷한 모양의 갈색 모자를 다시 사주셨던 우리 할아버지.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할까요? 왜냐하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충분히 드리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따라 하늘나라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가난한자의 오두막이나 임금의 궁궐이나 모두 찾아가 문을 두드린다’ 죽음이라는 것. 우리가 아는 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가장 공평한 것입니다. 만민 평등한 죽음이 그러나 우리는 무섭습니다. 영화 그래비티나 마션을 상상해 보십시오. 끝 없는, 적막한 어둠 뿐인 우주에 아무것 도 없고 나 혼자 있습니다. 시간의 개념이 잊혀질 만큼 아득해져 갑니다. 이것이 영원히 계속 됩니다. 어떻습니까?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죽음이 어떠했었다고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는 얼굴이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을 정도로 심히 고민하셨습니다. 가장 분명하고 공평한 사실은 이 죽음이 째깍째깍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IS의 테러 위협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산발적으로 테러를 자행합니다. 그래서 더욱 죽음이 나와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렵습니다.
  비단 물리적으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의 죽음만이 두렵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예수님이 죽었을 때 그녀도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세력이 살아갈 소망을 빼았아 갔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세력이 삶의 소망을 빼앗아 갑니다. 너는 실패작이고 너의 삶은 실패했다고 속삭입니다. 삶을 공허하게 만들고 무의미하다고 여기게 합니다. 이것의 대표가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어려워진 세계 경제와 각박한 삶은 나를 죽음의 그늘에 몰아 넣습니다. 이러다 내 인생 망하는 것 아닌가? 취직도 못하고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 아닌가?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다 매몰 되는 것은 아닌가? 각종 염려와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60세이상의 취업자가 20대 취업자를 앞지른 현재의 한국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국은 지금, 나이가 들었어도 쉬지 못하고, 젊은이들은 일할 곳이 없어 절망하거나 놀고 있다는 것입니다. 취직시험에 몇 번 떨어지자 아예 집안에 쳐 박혀서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가는 청년들이  늘어납니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책을 보고 있지만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암울한 현실과 무력한 자신을 바라보고 인생을 비관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의 걱정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물려줄 사람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들 모두 살아있으나 죽은 자를 방불케 합니다.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면안에  실패와 좌절, 절망과 두려움, 즉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사망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도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살아있으나 죽은자와 같았습니다. 저는 1984년 11월11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외조부모님댁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센터 역사를 섬기시느라 항상 밤 12시를 넘기고 깊은 새벽에 들어오셨습니다. 그 때 마다 저와 동생은 울어서 얼굴이 부어있었음에도, 줄기차게 늦게 오셨습니다. 성적으로 더렵혀짐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학생양들 말고 나는 도대체 하나님께 무엇입니까? 살아있으면 나를 어떻게 해보시라고, 잠잠하게 때로는 거칠게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도둑질도 했고 술과 담배에 찌들었고 정욕죄를 지었습니다. 밤새 어둠의 거리를 누비느라 찌든 몰골로 새벽 지하철을 탔습니다. 새벽부터 바삐 움직이는 착한 사람들, 그 사이에 우두커니 있는 나는 외지인 같았고 내가 있을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대학생활의 끝은 무엇일까? 내 삶, 내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일까? 터벅터벅 술에 취해 가누기 힘든 몸을 애써 이겨내며 바라본 그 날의 새벽. 저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허무함과 죽음의 세력앞에 늘러 붙었습니다. 삶의 밑바닥에 닿아서 더이상의 그 밑도 없었던 그 때,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장18절 말씀으로 저를 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죄를 용납지 않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저는 죄를 지은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과 다를게 없었습니다. 쾅! 쾅! 쾅! 저는 그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바울이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바울이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바울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바울이가 나음을 입었도다 바울이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바울이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저는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나를, 쏟아놓고, 사도바울과 같이 빚진자의 심정으로 살려고 결단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나 스스로를, 괴롭게하는, 고행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를 속죄해달라는 그러한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영접했는데도 마음은 어둡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달린 내 죄의 꼬리표가 내 삶이 끝나는날 까지 계속해서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감은 죄를 지우기 위해 빚 진자의 피의 십자가를 매겠다는 고백뿐이었습니다. 저에게 십자가는 고통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저는 그 십자가에 갖혀 또 다시 죽은자와 같이 된 것입니다.
  ‘바울 형제님의 그러한 모습은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 아직도 죄인 된 자의 모습 입니다.’ 저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정욕과 허무의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이런 저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찾아오셨습니다. ‘평안하냐’. 예수님은 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요8).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2). 대신에 용서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무서워서 도망하고 배반하였는데! 부활하신 모습으로 디베랴 호수(=갈릴리 호수)에 찾아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제게 드리운 죽음의 세력을 파하시고 저의 벌거벗은 몸과 영혼도 괜찮다 하시며 받아 주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피의 십자가에 갖힌 자에게, 그 너머에 있는 용서와 생명을 알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정죄의 세력에 갖힌 자를 해방시키시고, 진정한 자유와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저에게 생명 입니다. 생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상처 받고 죄 많았던 과거와 마주하며 화해의 악수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 생명이 있음으로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부활의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런 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수 목자의 비전을 갖게 되고 생물학 이학박사를 취득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게 삶의 의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집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 집이 팔리고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4:11,12)’.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막내 동생을 볼 때 마다 마음이 찢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 문제는, 땅바닥에 엎드려지기 까지, 하나님을 찾게하시는, 기쁨의 고난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물질의 부족이 영적 기갈 보다 났다는, 진리를 알게 하십니다. 영생을 선물로 주시고 천국소망을 갖게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훈련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은 저를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저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10년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단순하게 말씀에, 또 방향에 순종했습니다. 그랬을 때 가장 큰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바로 믿음의 결혼입니다. 잠시 프랑스에 가게 되어 떨어지게 되었는데 전철역 까지 배웅나온 동역자의 모습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보며 마음이 먹먹하더라는 겁니다. 고마워요~. 한 자매님이 그러셨습니다. ‘바울 오빠 때문에 성경 퀴즈 대회에서 우리 꼴찌했어 으이그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성경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읽고 연구해서 그것을 쓰고, 전달해드리고, 찬양으로 나누는 것이 즐겁습니다. 제게 맡겨진 마태복음28장 메시지를, 너무 쓰고 싶어서, 메시지를 쓰는 꿈도 꿨습니다. 혹자는 이 메시지가 고별 메시지냐고 묻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것은 동교센터에서의 고별메시지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5,6) ”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돌을 굴려내고 그 돌을 밟고 위에 서시고 끝내는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죽음의 세력에 무릎 꿇고 죽은자와 같이 된 삶의 실패자들 낙오자들을 일으키십니다. 생명을 불어 넣어 생명력 있는 삶 살게 하십니다. 저주 받은 십자가 형틀에 갖힌 자에게 꿀 맛 같은 자유를 맛보게 하십니다.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삶 살게 하십니다.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 죽음 가운데서 승리하신 승리의 왕,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4. 부활의 소식이 우리 손에 쥐어졌다.
  열한 제자는 마리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또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들은 갈릴리, 예수님을 처음 만났고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은혜가 깊은 그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과 감동적인 재회를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18~20절 말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죽음을 극복할 솔루션,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부활에, 죽음의 세력을 전복시킬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있습니다. 영생의 선물이 있고 하늘나라의 소망이 이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이 진리를 나에게도 전해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략을 세우셨습니다. 그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달 되었습니다. 복음을 가만히 가지고 있으면 전달되지 않습니다.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교 전략 입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지경을 확 넓히셔서 공간적으로 이스라엘을 넘고, 유다이즘을 넘고, 피부색과 인종을 뛰어넘으며 자기의 취향과 한계를 넘어서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가야 합니다. 가서, 둘째,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성령이 계신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도와서 그것이 제자 생활의 기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선교 전략의 핵심인데, 말씀에 순종하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모든 영역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제자로 키워야 합니다. 이 세가지 명령이 바로, 부활로 생명을 얻은자가 일생 이뤄야할 목표인 것입니다.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먼저는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단순히 의무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함께했던, 깊은 은혜가운데 있어야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샘솟는 것입니다. 나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어떤 분은 목욕탕이 나의 갈릴리 라고 고백합니다. 어떤분은 탁구장이 갈릴리라고 고백합니다. 저의 갈릴리는 어머니의 새벽기도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깊은 은혜를 누렸습니다. 서로 다른 갈릴리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의  갈릴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말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나의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부활이 왜이렇게 믿어지지 않는가? 왜이렇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두려운가? 하며 나의 연약한 믿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자들에게 부활의 소식과 지상명령을 주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명령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끝은 어떻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의 대장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여름 수양회에 참석한 나에게 임재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나와 함께 하십니까? 세상 끝날까지입니다.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죽음의 권세도 파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무엇이 염려가 됩니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어떤 장애물도 뛰어 넘을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일도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걸음걸음마다 부활 하신 능력의 주님께서 임마누엘 하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이제 부활의 증인으로써 드라마틱한 제 삶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저는 박사후 연구원 자리를 찾을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미국에 있는 예일대, 하버드대, 스탠포드대등 가장 유명한 학교의 교수님들께 지원했습니다. 그중 최고는 예일대에 있는 제임스 로스만 교수님인데, 이분은 2013년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이분이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셨는데 바로 저에게 관심이 있다며 비행기표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저는 분명 미국 학교에 지원했는데,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여러 나라 연구실중 프랑스 파리를 지명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데, 동역자가 독일시민이기때문에,  비자문제가 매우 쉽게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6월 23일 프랑스 파리의 어느 호텔. 저녁 7시에 로스만 교수님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연히 긴장하고 있었고 영어까지 못하니 땀이 두바가지  흘렀습니다. 이분은 저의 전공분야와 하고있는 프로젝트 뿐 아니라 개인적인 것 까지 물어보았습니다. 너의 이름은 왜 폴이냐, 영어의 그 폴이냐 물어보셨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이야기가 나왔고 어떤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한국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UBF라는 단체를 영어로 설명하라니. 인터넷에 근거없이 UBF를 비방하는 글들이 있는데 이글을 찾아보면 나를 고용하지 않겠지. 그러나 나에게 이 길을 주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고 길을 여시는 분도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믿음으로 그냥 UBF, university bible fellowship 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용기와 났는지, 그다음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Do you know American missionary Mother Sarah Barry? She is more famous than you who won the Nobel prize. 혹시 너 마더사라배리 라는 분 아니? 그분은 노벨상받은 너보다 유명해. What? 미국인 특유의 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여러분이 보셨어야 합니다. 이분이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UBF를 개척했어. 지금은 전세계 도처에 그분의 후배들이 있어. 이분은 기독교계의 마더테레사야. 같은 미국인의 이야기라 그런지 긍정적으로 들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나서 일주일 후 저는 이 교수님으로 부터 고용 계약서를 받게 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1요5:4). 이제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 프랑스 양들에게 가서 그들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며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일에 쓰임받고자 합니다. 오직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프랑스 제자 한사람을 세우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 복음이 나에게, 여러분에게 오기위해 이스라엘의 아득하고 오래된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복음이 이스라엘에 갖히지 않고 이를 극복하여 널리 퍼지기 까지 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온 유대와 사미라이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대로 이 복음이 8000km를 날아와 지금 이순간,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이 복된 소식을 알게 하고 싶었으면, 그 유구한 시간과 8000km의 장소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왔겠습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오 섭리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매일 매순간,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삶 살게 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같이 인사해볼까요? 안녕하세요, 헬로우, 봉주어, 구텐타악. 우리가 비록 연약하더라도 맡기신 곳에서 마리아 처럼 부활의 증인들이 됩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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