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여는 카라반들(Dr. Peter Kim-Kie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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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길을 여는 위대한 영적 카라반들!!!
Dr. Peter Kim (Kiev)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사야 43장 18-21절)
사랑하는 중앙 아시아의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무엇보다도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그 길을 달렸던 카라반들의 피가 흐르고 있는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흥분 시킵니다. 신변의 위험과 복음 전파의 어려움이 많이 있는 이곳에서 수고하고 계시는 믿음의 동역자님들께 하나님의 큰 위로가 함께 하시길 기도 합니다. 저는 이번 수양회에 참석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위로와 비전을 공유할 수 있을까를 묵상 하는 가운데 이사야 43장 18-21절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앙 아시아의 영적 현실은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습니다. 중앙 아시아 지역은 과거 중국 신장성에서 시작하여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을 지나 터키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중앙 아시아를 비롯한 실크로드 노선은 이 시대 악한 영과의 실제적인 영적 전쟁터입니다. 반면, 많은 선교 현장의 선교사님들과 선교학자들이 이제 하나님께서 실크로드 국가들 가운데 영적 부흥의 때를 일으키실 때가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알마티에 소재한 한 한인 선교사님이 설립한 복음주의 교회에 5,000여명의 성도가 모이고 있고 그 신앙이 너무도 뜨겁고 선교지향적이라는 사실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카작스탄을 넘어서 실크로드를 복음화 하고자 하는 이 선교사님의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미 이땅 가운데 부흥의 역사를 시작 하셨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 국가들을 복음화 하고자 하는 많은 성령의 강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연단 받은 수많은 중국 지하교회 성도들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예루살렘까지 복음화 하고자 하는 비전과 전략 가운데 활발하게 백투 예루살렘 운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속에 그리고 민족의 역사속에 새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실크로드 영적인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하나님의 선교 역사에 여러분들을 영적인 카라반들로 부르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밤 여러분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실크로드에 새일을 행하시는데에 쓰임 받는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삶속에 일어 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런 길이 없던 시절 실크로드의 선교사들과 카라반들은 산을 넘고 광야와 사막을 지나며 길을 내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고 문명과 신앙의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실크로드는 오아시스와 오아시스가 연결된 교통로입니다. 실크로드의 길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어떠한 마음을 품고 험한 산을 넘었을까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의 더위와 추위와 고독과 위험을 무릎쓰며 앞으로 전진 하였을까요? 그들은 높은 산에 길을 뚫었고 광활한 광야의 대지위에 길을 내었습니다. 대지의 숨막히는 더위를 피하여 땅 밑에 수로를 만들어 인간이 살아가는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산과 광야와 지하까지 실크로드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길 만드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동역자님들, 하나님께서 이러한 불굴의 의지와 개척정신을 가진 여러분들의 조상을 통하여 이러한 실크로드의 길을 만드셨고 이제는 여러분들을 통하여 복음의 실크로드르 만들고자 하신다는 것을 생각 할때에 참으로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광야의 특징이 무었입니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 길을 내지 않으면 그곳에는 정말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길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고 그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광야에서 수고의 노동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길 닦는 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통하여 광야에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래서 길은 그 길 닦는 자들의 삶이 응축된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은 역사의 주인공, History makers들인 것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삶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수고에 지친 몸뿐이라 할지라도, 결국 이름 모를 광야의 무덤뿐이라 할지라도 광야에 길을 닦는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요, History makers 인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많은 어려움과 수고가 있다 할지래도 길을 만들고 여는 개척자들의 삶을 사는 것이 참으로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곳 중앙 아시아에서의 여러분들의 개척자들의 삶을 주께서 축복하시고 여러분들을 위대한 History makers 되게 하시길 기도 합니다.
징기스칸은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만드는 자는 승리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가인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났을때 그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4장 17절) 성안에서의 도시 문화를 형성하고 죄악을 즐기다가 결국 노아의 홍수로 인해 심판을 받았습니다. 홍수 심판 후에도 바벨탑을 쌓으며 우상과 힘(Power)을 숭상하는 바벨론 제국 문화를 형성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세력의 대표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영적 광야와 같은 이곳에 살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가인의 후손들은 성을 쌓고 안주하며 살기를 즐겨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채에서 안주 하는 자들이 아니라 광야라 할지라도 길을 내며 복음을 들고 열국을 향하여 나가는 자들이요, 어떻게 하든지 광야에 길을 내어 땅끝까지라도 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 모임을 축복하시고 역사의 History makers들로 사용 하십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 길을 닦는 사람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항상 기억 하십시다. 비록 어려움이 있고 고난과 환란이 있어도 끝까지 이 사실을 기억하고 광야에 길을 닦는 복된 인생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으시고 역사 가운데 위대하게 사용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안락한 집을 떠나 새로운 길을 만들라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는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장 1-3) 자기 성을 쌓지 말고 길을 만들라는 명령 앞에 아브라함은 이미 75살의 나이였지만 믿음과 비전을 가지고 순종하였습니다. 그곳이 비록 아는 사람 한명 없고 반겨주는 사람 한명 없는 곳이었다 할지라도, 길을 닦는 새로운 삶을 시작 하였습니다. 자신의 일생 동안 그 길을 다 완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길을 닦는 길고 긴 신앙의 대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은 그 역사를 실현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된 우리들에 이르기까지 이 믿음의 프로젝트는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길을 닦는 인생을 시작함으로 역사상 위대한 History maker가 된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정, 바로의 성에서 떠나는 결단 없이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성을 쌓고 살았더라면, 과연 모세는 모세일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모세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진 것은 제국의 권력과 궁중의 화려함과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한 바로의 성에서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즐길 수 있는 그러한 곳에서 떠나 길을 닦는 인생을 살고자 결단함으로서 시작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그는 비록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었다 할지라도 이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길을 만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홍해에 길을 내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였고, 길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길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역사의 History maker로 세우셨습니다.
여러분 길을 닦는 자만이 하나님의 역사 속에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례 요한이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길 자체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세계 각처에 복음의 길을 놓는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반면 동시대에 살았지만 종교 권력의 성을 쌓았던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 정치 권력을 쌓았던 헤롯, 빌라도와 같은 타락한 정치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아무리 세상적으로 출세하고 돈이 많고 큰 권력을 가졌더라도 궁극적으로 성을 쌓았던 자들은 역사속에 다 사라지고 오직 그들의 악행만이 기억되고 있지 않습니까? 오직 길을 닦았던 자들만이 하나님의 역사에 길이 아름답게 기록 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고 작든 길을 만들며 도전하며 개척하는 삶을 살때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을 믿습니다. 광야에 길이 만들어지고 사막에 강이 생기는 역사가 있습니다.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캠퍼스 젊은이들이 생명의 양식으로 배불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정신을 상실하고 자기 성을 쌓고 안주하며 물질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와 타협하며 물질의 성, 정욕의 성, 종교 권력의 성을 쌓으며 광야의 스피릿을 상실하게 되며는 부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을 닦는 삶, 영적 카라반의 삶을 산다는 것이 축복이요 History makers의 위대한 삶인줄 알겠는데 과연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20년 가까이 CIS 지역에서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중의 하나가 «우리가 뭘 할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당신네 나라에서는 뭔가 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안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들 생각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의 대답은 «당신도 살아보면 곧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은 광야 같은 곳이라서 할 수 있는 일도 되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이 꽃피운 미국이나 유럽 또는 적어도 한국에는 살아야 뭔가를 할 수 있고 history makers의 삶을 살아도 살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Histroy makers의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꼭 세계의 중심국이나 선진국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과 성경적 관점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곳, 세계의 중심이라고 볼 수 없는, 문명과 역사의 변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곳에 살고 있다는 것, 그러한 곳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더 큰 축복이요, 특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으로 돌아가 몇가지 예를 찾아 봅시다.
우리가 잘알다시피, 예수님은 세계 제국 로마가 지배하는 시대에 태어 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팍스 로마나의 시대로서 로마 제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최강 제국이었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이 사시던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변방, 그것도 가장 촌스럽고 문제가 많은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곳에서 예수님은 일생 사역을 하시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의 주무대가 되었던 갈릴리 지역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무시당하고 멸시당했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각색 병든자, 귀신들린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공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내시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며 병든자를 고쳐 주시고 비린내 나는 몇몇 어부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제자 양성 하시었습니다. 주님은 권력과 돈과 명예와 온갖 재미거리가 있는 문명의 중심부인 로마를 사모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갈릴리라는 변방의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높이셔서 만민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인생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중심지로 가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사도행전 19장 21절)는 비전을 붙들고 마침내 로마에 갔지만 그는 로마에 가서 로마의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그곳에서 오래 머물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거쳐 당시 땅끝이라 생각되었던 서바나로 가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시문명과는 동떨어진 좁은 감방에 갇혀 일대일 하고 복음을 전하며 몇사람 제자양성 하다가 순교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감방에서의 사도 바울의 이러한 식의 복음의 길을 내는 사역을 통하여 불과 몇백년 후에는 거대한 로마제국이 기독교화 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즘, 수많은 메시지가 출세주의, 성공주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계각층 및 각분야에서 최고의 사람들이 되고 출세해서 일단 성공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엘리트 주의, 성공 논리를 우리의 신앙에 그대로 접목 시킵니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먼저 세상에서 엘리트가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라고 하니 이 세상의 길과 십자가의 길에서 갈등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이 얼마나 달콤한 메시지입니까?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의 탈을 쓴 인본주의가 수많은 신앙인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왜곡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사역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에는 130여분정도의 한인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중 많은 분들이 세상 문명의 중심부에서 목회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와 같은 변경 국가에 와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도 그렇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깊이 생각해보고 회개해야할 문제입니다. 참된 선교는 문명의 중심부로 가는 것이 아니고 문명의 주변부로 가는 것입니다. 땅끝을 향하여 주변부를 향하여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복음을 듣지 못한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믿으시고 확신있는 삶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변방국가들에 살면서 신앙생활하고 선교생활하고 있다는 것, 깊이 생각해보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입니까? 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자들이요, History makers의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러면 권력과 물질과 온갖 문화가 성행하는 바벨론 문명의 중심을 갈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변방의 낮은 곳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땅끝까지라도 가고자 하는 분명한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가치관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이러한 삶의 가치관을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 받는 것을 더욱 낫게 여겨 기꺼이 광야의 삶을 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40년동안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며 광야의 영성을 쌓았고 출애굽의 지도자요 광야의 영적 지도자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보면 미래의 대안은 항상 변방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문명이 도시 문명의 힘으로 부상하고 또는 제국의 힘으로 부상 했을때 새로운 대안이 다른 변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바로 그곳 변방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흥미롭게 우리의 가슴을 뛰게하는 사실입니까? 그래서 역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기 원하는 사람들, 즉 History maker의 삶을 꿈꾸는 자들은 문명의 중심으로 가지 않고 새로운 역사의 대안이 시작되는 변방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는 바로 이러한 가치관과 역사관 그리고 선교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의를 준비 하면서 Mother Sarah Barry 선교사님이 생각 났습니다. 왜냐면 그분이 바로 이러한 좋은 예가 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은 세계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미국의 중심 문명을 부인하고 변방중의 변방인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그때는 한국 전쟁이 끝난 후로서 한국의 상황은 비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Mother Sarah Barry 선교사님은 이러한 민족을 위하여 젊고 아름다운 처녀로서의 결혼의 꿈도 부인하고 그 삶을 온전히 한국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한 여인의 길을 내는 삶을 통하여 하늘의 별떼와 같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한국 및 전세계 가운데 일으키셨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교 역사에 길이 남을 History maker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면 이러한 예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변방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한 복음을 듣지 못한 ,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그러한 민족에게로 가야 합니다. 세상은 문명의 중심을 향해 나가지만 우리는 문명의 변방으로 복음을 받지 못한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세상은 돈이 있는 곳, 권력이 있는 곳, 쾌락이 있는 문명의 중심을 향하여 불나방처럼 달려 들지만,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 저 변방 민족들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가는 영적 카라반들의 합당한 자세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이 광야와 같은 중앙 아시아 땅에서 살면서 죄로인해 사막처럼 말라버린 양떼들의 인생 가운데 복음의 길을 내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인지를 아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소신과 영성과 사명을 가지신 분들이 되어서 성령께 붙잡힌바 된 멋있는 주님의 제자들로 살아 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변방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하나님 나라의 History maker들! 광야에서 길을 열어가는, 역사를 열어가는 이 시대의 영적 카라반들! 이 얼마나 멋있는 사명인의 삶임니까? 아멘.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너머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또다른 수많은 복음의 변방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여러 중앙 아시아 민족들, 실크로드 국가들, 그너머 우리 앞에 중동의 많은 이슬람 국가들이 복음의 변방들로서 우리의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품고, 그 땅을 껴안고 기도합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도전 할 때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19-2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겠다, 하나님이 새일을 행하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옛일을 벗어버리고 새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막강한 세계 제국 바벨론의 노예생활에서 벗어 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자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을 움직이셔서 하루 아침에 광야에 길을 내시고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사막에 강을 내시고 그들을 마시우고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정욕으로 광야요, 사막 같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길을 내시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을 내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만나로 배불리우시며 영원한 생수로 우리의 목마름을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복주실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들짐승처럼 되어버린 수많은 중앙 아시아 민족들, 실크로드 민족들, 나가서 중동의 이슬람 민족들 가운데 새 일을 행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 하십니다. 사막같은 민족에서 영생수를 마시도록 하시며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서 중앙 아시아와 전 세계 캠퍼스에 그 생수를 나누어주는 민족들로 축복 하시겠다 약속 하십니다.
중앙 아시아 백성, 실크로드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는 백성으로 삼으시겠다 약속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요, 비전입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성경은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히 행한다 하였습니다. 비잔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비전이 있으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중앙 아시아 민족 또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비전이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밤, 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병든 삶이 강건한 삶으로 변화되는 믿음의 체험을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중앙 아시아 민족들 나가서 실크로드의 나라들로 나가서 History makers의 삶을 사는 영적인 카라반으로서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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