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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를 세우는 소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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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488회 작성일 10-09-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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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감론
2010년 9월 3일 이엘리야

  UBF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방법은 일대일과 그룹 바이블 스터디가 있고 또 하나 독특한 것은 소감쓰기이다. 소감 쓰기가 이 모임에 자리잡게 된 것은 1973년도 요한복음 1장을 공부하면서 가진 ‘내 생명 심포지움’부터일 것이다. 이 심포지움에서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남으로 인한 기쁨과 슬픔과 무거운 짐들, 그 슬픔과 무거운 짐들을 끌어 안고 고민하던 문제들과 숨겨진 모든 죄악들을 다 들어내고 예수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무거운 생명의 문제를 해결한 기쁨 때문에, 모두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느라고 발표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생명 심포지움’은 한 학기 내내 계속되었고 여름 수양회에서 전국적으로 ‘내 생명 심포지움’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인생 소감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었고 여름 수양회의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후에 소감은 이 모임에서 성경 공부 방법이요 제자 훈련 방법으로 쓰여지고 있다. 공부는 머리로 할 수 있지만 소감쓰기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쓸 수 있다. 말씀이 마음에 역사하지 않거나 마음 속에 거짓이 있으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소감을 씀으로써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재미로 삼기보다 생명으로 삼았다. 또 소감을 통해서 자신의 죄악과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투쟁한다.

  소감은 유비에프(UBF)의 독특한 용어로서 독후감, 반성문, 수필, 일기와는 다르면서도 그 모두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개념을 갖고 있다. 소감은 일대일 성경 공부나 그룹 성경 공부, 요회나 팀 등 유비에프(UBF) 내의 다양한 소그룹에서 나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소감은 대규모 모임이 빠지기 쉬운 조직적 관계 대신 소그룹 특유의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며 그런 친밀하고 내면적인 관계 가운데 자연스럽게 구성원들에게 공동체의 가치관이 전달되고 양육과 계승이 이루어진다. 일대일 성경 공부 모임이나 요회 모임, 팀 모임 등에서 구성원들은 미리 작성해온 소감을 나눈다. 이 소감을 통해 자신만의 은밀한 고민과 죄악, 허물, 실패와 같은 평소에 드러내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각자 드러내게 된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문제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지지자들이 생기게 되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기도 제목을 나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은 따로따로 떨어진 개인에서 내면적 유대의식을 가진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해 나간다. 즉 소그룹 공동체에서 소감을 나누는 가운데, 다시 그 소감문이 소그룹 공동체를 새롭게 형성해 주고 강하게 결속시켜 준다. 정준기, 자서전의 영성, (광신대학교출판부), 123. 처음 소감을 쓰는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묵상없이 그 말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은데, 유비에프(UBF)에서는 그러한 소감을 지양하며 자신의 생각이 아닌 성경 말씀 자체를 정리하고 깊이 영접하도록 훈련을 준다. 소감의 긍정적인 면을 적극 살려 나가야 하고 소감의 역기능은 보완해 나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즉 소감 훈련이 인위적이거나 강압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소감이 개인의 관점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형제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감을 씀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 우리를 알고 계시는 궁극적 실재자가 아주 깊은 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에 응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영적 성장을 위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을 추천할 수 없다. 발터 윙크, 이금만 옮김, 영성 발달을 위한 창의적 성서 교육 방법, (한국신학 연구소), 140.

  소감을 쓰고 나누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를 깊이 발견하고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번역으로서의 성경 공부
    반 세터스(Van Seters)는 오늘날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종교적 소비자들의 집합체”로서의 교회라고 말한다.  Van Seters, "Interpretation 55(3), The problematic of preaching in the Third Millennium." 267-280.
  개인들의 가치와 정체성의 커다란 파편들이 있다. 이와 같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성경 공부를 위해서 성경 공부는 개개인의 정체성이 나누어 질 수 있도록 하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한다. 대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Ibid. 이상흥, 89-93 대화적 커뮤니케이션은 복음이나 메시지나 또는 사상을 교환하고, 나누고, 해석함으로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가 복음을 해석하고 영접하는 가운데 구원과 의미와 인간의 운명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우리가 이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안내자로서 우리의 전존재를 주게 된다. 마침내 이 메시지에 따라 살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는 단순히 성경공부 리더의 주도적인 혹은 일방적 성경지식전달식의 공부가 아니라, 개개인이 성경을 통해서 정체성을 확립한 이야기를 서로 나눌려는 그런 성경공부의 커뮤니케이션의 환경이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공부가 서로의 신앙의 정체성을 기꺼이 나눌려는 즉 함께 성경공부하는 형제, 자매를 서로 알고자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나. 나눔으로서의 성경공부

  성경공부의 커뮤니케이션 환경은 본질적으로 대화적(dialogue)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이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기 위해서 성경 공부는 개개인의 정체성이 나누어지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나누는 일은 기억하는 일(remembering)과 그 기억을 나누는 일(sharing)로 구분할 수 있다.

    (1) 기억하는 행위로서 성경 공부 돈 E. 샐리어스, ⌜예배와 영성⌟, 이필은 옮김. (서울:은성. 2002).
        교회가 회중 생활을 함에 있어서 신앙의 공동체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시는 은혜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근원이 아님을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Bruce C. Birch, ⌜회중생활의 기억⌟(웨슬레 신학교 논문), 32  그러므로 회중 생활의 의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항상 설정되는 것이므로 회중 자체의 이기주의에 이끌리지 않도록 기도와 반성으로 숙고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이기주의가 성경에 기록된 신앙 공동체에게도 역시 유혹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선시하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하심에 대한 신앙 공동체의 응답적인 자세가 상실되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언약이 파괴되고, 이기적인 죄악들이 자행되는 결과를 낳게 되므로 성경적 전통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신앙 공동체는 기억과 비전의 요소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A congregation is formed around of the qualities of memory and vision).  기억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믿음의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회상하는 활동을 하게 한다. 비전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장차 행하실 일들을 예기케 하는 활동들과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일치되는 섬김을 하게 한다. 기억과 비전의 함양은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감을 낳게 한다. 신앙 공동체는 한 쪽 발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끌어 내는 역사적 전통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쪽 발은 미래, 즉 그 신앙 공동체가 예기하며 이를 행해 살아오는 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공의와 온전함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미래 안에 확실히 서 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첫 말씀은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회상을 하도록 촉구하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도 역사적인 기억을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2:22). 우리들의 전통 안에 있는 신앙 공동체는 추상적인 철학적 원리나 혹은 사회-정치적 이론을 중심하여 조직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회상하는 행위로서 지속되어 오는 역사적 특이성을 중심하여 조직되어진 것이다. 그 같은 회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어떻게 되라는 소명을 받았음에 대한 비전이 온다.
  성경 시대의 공동체들 안에서처럼 기억과 비전, 그리고 정체성과 사명감들은 현대의 회중들의 생활 가운데서도 필요하며, 그것은 상호관련이 있다.  흔히 회중 생활의 이 두 가지 면들을  양자택일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양쪽의 어느 하나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회 생활이 왜곡된다. 기억과 정체성만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이들(가령, 사명으로부터 떠나서 성경을 읽는 것을 신앙 생활의 목적으로 삼는 이들)은 화석화될 위험이 있다. 화석은 과거를 향하여 지극히 충성된 증거는 하되, 현재와 미래를 향하여 응답하는 능력은 없다. 신앙의 기억 안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비전과 사명감만을 강조하는 회중은 카멜레온과 같은 교회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소유하지 못하였으므로 어떠한 이념, 문화적 여건, 또는 주위에서 발생하는 유행의 색상이든지 간에 그것을 쉽게 받아들인다.
    모든 세대를 위한 교회의 정당한 신학은 기억과 비전을 모두 필요로 한다. 우리들이 과거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는 것과 하나님의 미래를 믿는 것은 우리를 현재의 횡포로부터 자유케 해 준다. 너무도 많은 회중들이 저희들의 현재(예산들, 교인수 감퇴, 복잡한 사회문제들)의 도전에 압도당함으로써 그들의 과거로부터 단절당하고 비전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에서 사용한 히브리어 동사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형이 따로 없다는 것은 아주 교훈적이다. 그 대신 다만 행동의 완성과 행동의 미완성을 나타내는 동사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실하기를 추구하는 회중은 그의 현재 안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회중이 자신의 기억을 하려고 힘써야 하며, 미래 안으로 반드시 들어가야만 한다.
 
  회중의 기억은 그것 자체가 결코 하나의 목적이 아니다. 사명을 향한 교회의 비전을 활성화함으로써 균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그러면 회중 안에서 기억의 중요한 기능은 무엇인가? 회중 안에서 기억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개개인의 신앙의 정체성은 확립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신앙 정체성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이 개개인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이, 그리고 공동체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이 함께 기억되고 나누어 질 때, 비로소 공동체의 신앙의 정체성이 확립될 수 있다 Ibid. 95-96.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은 성경에서 기원한다.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서는 말씀 가운데 이스라엘에, 그리고 초대교회에 구원을 베푸셨던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그 하나님과 그 사역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개개인의 기억하는 일과 나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지금 어떻게 일하시고 계시는가를 알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Ibid. . 그러므로 이 기억하는 일은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트렘퍼 롱맨, ⌜삶으로 이어지는 성경읽기⌟, (서울:네이게이토출판사, 1999). 90-91.
  신국원, ⌜포스트모더니즘⌟, IVP, 1999. 260.
 
 
  회중의 기억의 자원들은 성경과 전통이다. 회중의 기억은 신앙의 성경적 공동체들 안에서 그 뿌리를 찾도록 소급되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못하면 사회의 많은 자원봉사 단체들 중의 하나가 되거나 기독교의 교회가 되게 하는 전통들로부터 단절되게 될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근원의 기록과 교회를 존재하도록 부르신 하나님께 대한 증거들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것은 성경적 기반들 위에 놓여 있으니, 우리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분별하기 위해서도 성경적 전통 안에서 신적 자아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의존해야 한다. 사실,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교회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이해를 선명히 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한다.
 
  특히 성경은 우리들의 신앙의 초점의 중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에 대한 고유하고 권위 있는 증거이다. 예수님과 어떤 관계을 가짐과 시인함과 관계성의 적용을 떠나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는 있을 수 없다. 잘 짜여진 교육적 프로그램들이 시행되어지고 있다하더라도 정성들인 교과과정들은 본의 아니게  사람들을 회중의 기억의 근원들에 직접 접하는 것을 실제로는 가로 막고 있다. 우리들로 하여금 성경 자체를 연구하는 것을 배우게 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 성경에 관하여 말한 것을 공부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 교인들이나 심어지 신학교의 교육 커리큘럼마저도 그들 자신들이 성경적 성찰의 생산자들이 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성경적 성찰의 소비자들이 되어 버렸다. 유비에프(UBF)가 성경 자체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다른 선교 단체나 교회에게도 본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저자는 성경 해석의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학자들은 오늘날 성경 공부를 위한 성경해석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개개인의 문제와 신앙의 성장에 더 초점을 맞추는 개인주의적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상흥은 개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데 이 일은 공동체를 통해서 개개인의 신앙의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한 성경 공부의 형태로 일대일  성경 공부보다는 소그룹별 성경 공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대일 성경 공부의 장점 중에 하나가 개개인의 정체성 확립에 공헌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일대일 성경 공부가 개개인의 신앙의 정체성은 확립할지 모르나 공동체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다. 그리고 개인주의로 흐르기 쉽다.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하되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공동체의 시각으로 성경 해석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저자의 의도를 따라서 해석해야 함은 물론이다. 저자의 의도란 성령의 의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칼빈은 성령이 성경의 참된 저자요, 해석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의 의도를 찾는 것은 본문의 단순하고 자연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의미했다.  김재흥, 칼빈의 성경 해석 논리(논문, 2004), 21.    칼빈은 주장하기를 성경의 저자는 자신들의 특징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통하여 성경적인 수사학을 보여 준다고 한다. 결국 성령은 성경의 저자들을 통하여 간결하고 용이한 방법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은 성령과 분리되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말씀은 글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다(엡6:17). 말씀은 인간의 골수와 영혼을 쪼개는 검이다(히 4:12).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검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필수적이다. 성경의 참된 의미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고광필, ⌜개혁주의 신한 연구논문 1집⌟, (광주, 광신대출판부, 2000.9), 19..
 
    성경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책이다. 그래서 성경을 교회의 책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함에 있어서 공동체 관점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을 해 나갈 때 정체성의 통합이 일어난다. 개개인의 정체성이 나누어질 때, 개개인들의 정체성은 서로 연결되어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형성되어져 간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성경 공부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개인보다 공동체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개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셨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약속을 주셨다.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들이 나의 하나님을 알도록 역사하셨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을 공동체로 묶어서 계시하셨다. 사도행전 7:32절에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즉 하나님은 자신을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시다. 아간이 범죄를 다루실 때 개인에게만 심판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패배를 안겨 주심으로 한 개인의 문제를 공동체가 감당하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세우셨는데 열둘이라는 제자의 숫자는 열둘이라는 이스라엘 지파와 관련될 수 밖에 없었다. 열 두 지파란 실상 이스라엘이 품고 있었던 말세론적인 희망의 핵심을 말해 준다. 당시에 12지파 체제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지만 사람들은 말세 구원의 때에 열두 지파를 총망라한 완전한 민족 부흥이 이루어질 것을 대망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결코 이방인을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오로지 이스라엘만을 상대로 삼으신다. 우선 예수님은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 열두 제자를 파견하며 제시한 원칙을 예수님 자신도 지키신다. 마태복음 15:24절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이방인 지역에도 들어가기는 하시되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설교하려는 일은 없었다. 산발적으로 이방인과 마주치는 경우는 있어도 의식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지는 않는다. 바로 이런 만남들이 일어날 때야말로 중요한 관심사는 오로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특별히 구별되게 나타난다.

  이사야 2:1-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드러나는 구원에 매혹되어 절로 하나님 백성에게로 몰려든다. 선교 활동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매력에 이끌린다. 이와 관련된 예언 대목들은 대개가 예루살렘이 발산하는 찬란한 빛에 관한 말씀이다. 이 빛은 말세에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이 되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는 공동체를 통한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예언자적 해석 곧 이스라엘 선택사관을 깊이 소화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의 호소에 불응하는 그때에도 예수님은 공동체 사상, 즉 하나님 통치에는 한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이제는 자기 제자들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셨다. 이제는 온 이스라엘을 도외시하지 않되 제자들의 공동체에다가 하나님 나라를 연결짓는 것이다.

  제자들은 정작 온 이스라엘에서 일어났어야 할 것을 표출하는 징표가 될 소임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전력으로 헌신하는 일이요, 새로운 생활 질서에로 철저히 회개하는 일이며, 형제자매 공동체로 모이는 일이다.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폐쇄되고 더구나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뭉치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하여 개방되고 늘 온 이스라엘을 지향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게 하자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옛 하나님 백성 이외에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또는 이스라엘 대신으로, 이스라엘과 교체하려고 제자들을 불렀던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이다. 예수님의 산상 설교는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상대방은 고립된 개인도 아니요 인류 전체도 아니요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자단이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가족관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떠날 것을 제시하셨다. 가족을 두고 떠나는 일은 극히 철저하고도 강경한 요구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요구를 글자 그대로 자기를 따라오던 사람에게만 제시했지, 온 백성에게 제시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을 밖에 두고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3:35)”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참 이스라엘의 모임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은 다가온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믿고 말세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가족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땅에서 누구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이제 교회가 산 위에 빛나는 도시가 되기를 바라신다. 산위의 도시란 세상을 바꾸어 놓는 그런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교회가 소금으로서의 짠 맛을 잃어버리고, 나약하게 되어  빛을 발산하지 못하고 만다면 교회의 존재의미가 사라지는 것이요,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게 되고 그리하여 사회는 다시는 하나님을 알아뵙지 못할 처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 제자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될 수는 없지만 오늘날 교회와 하나님 나라 사이의 괴리 현상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또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들 안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재의 일이라야겠다는 입장을 굽힘없이 고수하는 그런 교회론이라야만 실질적으로 올바른 교회론이다.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을지언정 가시적, 가촉적, 경험적이라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개인은 전체의 총화이고 개인의 의미는 공동체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해석을 개인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결하는데서 더 나아가 공동체에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데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 개인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각자의 은사를 발휘해서 그 몸을 세우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교회가 분열이라는 깊은 상처를 갖게 된 배경에도 개인 신앙과 경건을 중시하면서 공동체성을 많이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되는 성경 공부를 힘쓰기 위해서라도 공동체를 세우는 성경 공부가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2) 나눔의 행위로서 성경 공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일은 또한 적극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져야 한다. 즉 성경 공부는 개개인의 기억 혹은 신앙의 정체성을 나누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나누는 일은 개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누는 행위이다. 개개인의 정체성을 나눔으로서 공동체의 정체성이 형성되어진다.  공동체 형성을 위한 성경 공부 사역은 개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누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것들을 나누는 것을 유비에프(UBF)에서는 성경 공부 때 뿐만 아니라 성경 공부가 끝나고 소감을 써서 나눔으로 이루어진다. 유비에프(UBF)에서의 소감은 소그룹 활동을 통해 적용되는데 그 단위는 목자와 양이 함께 공부하는 일대일 성경 공부, 비슷한 또래의 회원들이 모여서 훈련을 받는 팀모임, 유비에프(UBF) 내에서 가족과 같은 단위로 볼 수 있는 요회(Fellowship) 등이 있다. 이러한 소그룹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 모임을 갖는데 그 모임 때마다 주일 소감이나 일용할 양식 소감을 나눈다. 그런데 이런 나눔의 과정이 너무나 솔직하고 진실함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수치스런 과거와 치명적인 잘못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누구나 자신이 가치 있고 존중받을만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면의 겉모습과도 같아서 자신의 진짜 이면의 모습을 감추려고 하면 할수록 위선적이고 거짓된 이중성으로 인해 내적 긴장과 갈등은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눔에서 필연적으로 윤리적 결단이 온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공과 실패를 나누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슬픔과 고통도 함께 나눈다. 그러면서 치료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또 이런 소감 발표를 하는 가운데 일체의 세상 자랑이나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이 실상은 한순간의 덧없는 허상이요, 안개와도 같은 것임을 일깨워 주며 진정한 내적 통합과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깊이와 감동이 있다. 이런 영적 깨달음과 자아 발견을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소감을 쓸 때 오랫 동안 깊이 있는 묵상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감을 쓰는 시간이 하나님과의 교제, 사랑, 자유, 기쁨을 나누는 전인격적인 행복의 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한다. 하나님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과 찬양, 성경 말씀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통찰이 없는 소감쓰기는 경직화, 형식화에의 위험이 따른다. 그 결과 소감은 모임 안에서 매주 써야만 하는 과제처럼 피상적인 글쓰기가 되어 버린다. 소감을 쓰는 요령 자체에 익숙해지고 발표용으로 쓴다면 타성에 빠져 버리게 된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과 은혜가 없이 지적 만족 자체로 끝나버릴 우려가 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 앞에서 소감을 쓰게 되면 일종의 쇼가 되어버릴 수 있다.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냄새를 풍기는 소감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식상하게 하기 쉽다. “이렇게 쓰면 인정받겠지”, “이런 내용을 쓰면 야단 맞을텐데…”등 듣는 이의 반응을 의식하게 될 때 소감의 생명력은 퇴색해 버리고 만다.
  또한 잘못된 영웅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에서 성공하고 승리한 이야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야기들을 자랑하는 소감은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영웅이 못된 자, 학벌이 없는 자, 장애자, 가난한 자, 불구자, 열등한 사람, 양 못치는 사람, 헌금을 많이 못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숨을 쉬고 교제를 나누며 한 마음으로 공동체를 이루기가 어렵게 된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분위기에서 치료가 일어나지만 외적인 확장과 성공 논리, 영웅주의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고의 영성인 용서의 단계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개개인의 정체성을 기꺼이 나누겠다는 그러한 성경공부 커뮤니케이션 환경과 그리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개인뿐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개개인과 공동체 안에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함께 나눔으로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은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형성되어 진다. 이상흥, op. cit. 95-102.
 
다. 용서로서의 성경 공부
  성경 공부는 용서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서, 목자와 양 사이에서,  동역자들의 사이에서 용서가 일어나야 한다.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 상호간, 그리고 나 자신이 나를 용서해야 한다. 특히 공동체를 세우는 성경 공부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공동체 안에 지체들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나누는 일들을 통해서, 서로 간에 얼마나 무관심하였으며, 또한 상처를 주었고 이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 졌는지, 등등 이런 나눔을 통해서 영성의 최고의 단계인 용서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용서가 일어날 때, 진정으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질 때 참여자 간의 형제애가 깊어진다. 또한 이런 용서는 단순히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의 관계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 속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 행해왔던 일들 속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진정한 용서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교회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유지할 때만 가능하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때, 교회는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1)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때 교회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성경 공부는 단순히 인도자 개인의 사역이 아니라 공동체 전부가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의 다른 사역들과 함께 협력해야 하는 공동사역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귀신이 떠나가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앉은 뱅이가 걸으며,  소경을 눈을 뜨는 등 전인 치료와 함께 나타났다.  교회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회복할 때 강력한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세상에서 소금과 같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2) 성경 공부는 공부 시간에 듣는 사건에서 선포된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이 공동체 개개인들의 삶 속에 실현될 때까지 말씀의 순례가 되어야 한다. 즉 소감을 쓰고 결단한 것들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순종해 나가야 한다.  앞에서 섬김으로서의 선교에 대해서 언급한 대로 자발적으로 종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막10:45). 그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몸으로 본을 보여주었다.  신자들의 종된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3) 오늘날과 같은 상대주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되어서 복음이 효과적으로 되어지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의 윤리적 삶과 우리의 선포가 분리돼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삶과 선포는 통합되는 성경 공부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경 공부를  통해서, 교회는 세상 속에서 공동체로서 세워지게 된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자체가 선교이다. 뉴비긴은 공동체의 삶은 성경 해석의 결과라고 말했다.  신자들이 말씀을 생활 속에서 깊이 경험함으로  증인으로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소그룹에서 소감을 나누는 것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치료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도 12 명의 제자들과 소그룹 형식으로 3년간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으시며 그 효과를 직접 증명하셨다. 물론 성경에서 교회는 소그룹으로 모여야만 한다는 직접적인 명령이나 권고를 한 적은 없지만 예수님의 모범이나 가정 교회 중심으로 형성된 초대교회의 독특한 소그룹 공동체를 생각해 볼 때 이는 유기적인 교회 공동체 형성에 있어 효과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용서로 인해서 치료가 될 뿐만 아니라 상호 교정이 일어나게 된다. 이는 공동체의 성숙으로 이어진다. 성경 공부 참여자 개인의 존재 변화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형성되면 이것은 윤리적 문제로 나아간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소감을 쓰는 사역은 지적 유희 이상이 되어야 한다. 제 3자가 보는 것 같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때 우리는 갈등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존재의 변화 뒤에는 헌신이 뒤따라야 한다. 이렇게 공동체가 될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려면 어떻게 성경을 공부하고, 어떻게 개인을 도와야 하는가?
첫째, 정체성 나눔의 공간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 둘째, 기억하는 사역과 나누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셋째, 용서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소감을 쓰고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세워나간다. 소감은 여러 가지 점에서 치유와 용서, 공동체를 이루는 역할을 한다. 공동체를 세우는 성경 공부 방법은 공동 생활을 통해서 실천되어져야 하고 특히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생활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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