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모임 메시지 -내 인생 최고의 가치 (윤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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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 마태복음 2:1-12
요절 | 마태복음 2:11
내 인생 최고의 가치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성탄절을 잘 보내셨습니까? 성탄절은 지났지만, 지난 한해를,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본문 말씀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은 놀랍게도 아주 뻔한 이야기를 마치 새롭고 놀라운 사실처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항상 듣는 이야기고 뻔한 말씀이지만 마치 새롭게 놀라운 사실인양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무색하지 않으니까요.
본문 말씀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여행은 어쩌면 모험에 가깝습니다. 이들이 멀리 수천 km 떨어진 동방에서부터 왔을 때는 도중에 수많은 위험이나 어려움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돈도 들고, 시간도 들고,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작정 별을 따라 왔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걸어서 길을 떠날 만큼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아무리 봐도 그들이 먼길 와서 뭔가 대단한 가를 얻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놓고 갔습니다. input 대비 output 이 없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와서 식대, 차비, 기름값도 못 건지고 돌아갔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왔을까요
동방에서 온 이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말 때문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습니다. 버젓이 유대의 왕인 헤롯 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데 이런 말 들으면 소동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럼 이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만의 왕일까요? 유대민족의 왕이라고 하면 굳이 멀리 동방에서 목숨걸고 찾아올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헤롯도 아는 것은 유대인의 왕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 메시야,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은 세상을 구원할 빛과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생각할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전쟁의 역사입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죄다 전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피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권력, 영토를 뺐고 뺏기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압제 속에 고통하였습니다. 이러한 세상 역사를 보고 연구하며 그들은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새 역사를 소망하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피의 전쟁으로부터, 권력자, 부한 자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전쟁 대신 화평을, 억눌림 대신 자유를 주고, 사나움과 강포함이 아닌 선함과 진리로 다스릴 왕! 인류의 역사 속에 그런 메시야의 평화와 구원의 역사는 칠흙 같은 어둠의 터널 끝 에 보이는 환한 빛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따라온 별은 단순한 별이 아니라 어둔 세상에 비치는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런 그들도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제까지 순수하게 별을 따라왔던 이들이 길을 잃은 까닭은 눈부신 예루살렘의 불빛 때문이 아니었을 까 생각합니다.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밤하늘의 별들을 잘 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곳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헤롯궁 어디에도 유대인의 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별을 따라 찾아갔더니 어느 집 단칸방에서 유대인의 왕을 찾았습니다. 어느 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갓난 아기였습니다. 이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라니. 당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그들은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아기라면 얼르고 달래주고 축복해주면 될 거 같은데, 경배한 것은 이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보았습니다. 사람들 위에 올라 서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세상 왕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구원자를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헤롯 궁에 있는 상위 몇 %의 사람들이 아닌 그 시대에 가난하고 굶주리고 압제 받던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구원자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물이나 선물을 할 때는 생각없이 아무 것이나 하지 않습니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준비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 까요. 메시야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세우실 영원한 나라.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피조물이 화목하게 될 소망, 메시야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이룰 용서와 화평의 역사를 생각하며 예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역사를 기대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메시야가 이룰 역사를 고대하며 그들도 긍휼과 용서와 화평을 행하며 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경배하면서 드렸던 예물대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캠퍼스에도 홍대 땅에도 소동이 있었습니다. UBF 때문이었고 우리 센터 때문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따르는, 바보같기도 하고, 천진난만하기도 한 우리 모임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복음에 대한 순수하게 살아 있는 믿음, 순수한 열정, 별을 따라가는 구도자의 열정과 같은 것이 사실 이 홍대 땅을 소란하게 하였습니다. 그럼 이런 것이 옛날 일인가 현재에도 통하는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열정이 식었다고 하고, 첫사랑이 식었다고 하는 데 열정만으로 할 수 있는 가. 의지로만 할 수 있는 가. 묻고 싶습니다. 사람의 열정과 의지 만이었다고 하면 언젠가는 식어지고 언젠가는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이상적인지는 몰라도, 감동이 있었고 그 감동 때문이라고 하면, 정말 그 때 내 인생이 뒤집어지고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면. 내 인생을 전부 걸어도 될만한 가치를 찾았다면 현재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씀에 대한 감동이 과거 학생 때가 아니라 5년전, 10년전이 아니라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현재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동방박사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처럼 머나먼 여정 길을 떠나야 했을 까. 무엇이 그들을 가만 있지 못하게 하였을까.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저는 주목해 본 것입니다. 저자 마태는 왜 동방박사들에게 주목하고 있습니까? 내 인생을 뒤집어 놓으신 예수님, 인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최고의 가치가 되신 예수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치 예수님이 태어난 헤롯왕 때처럼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세상 권세,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없고, 은혜와 긍휼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았습니다. 무자비함, 이기심 속에 병든 사람으로. 무정하고 무감동하지만 병든지 모르고 살아가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정말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를만한 최고의 가치였고, 그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한 것으로 내 인생은 기쁘고 만족스럽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으시대고, 자기를 높이려는 세상 속에서, 화려한 자리 아닌 낮은 자리에 오신 유대인의 왕의 모습 속에서. 정작 마태 자신은 과거 가난하 자, 없는 자의 설움을 떨치고자 세리가 되었지만, 그 가난한 자, 없는 자와 함께 하고자 내려오신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돈으로 처바르고 칼로 무력으로 공권력으로 내가 왕이다 주장하는 세상 왕이 아니라 나보다도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이지만 저절로 그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경배하게 되는 진정한 왕되신 예수님! 자기를 주장하며 살던 그 때 얻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오히려 이제는 황금 같은 청춘, 내 시간, 내 인생 다 내려놓고 다 예수님께 드렸지만 오히려 기쁘다. 즐겁다. 마음이 행복하다. 왜 그럴까. 왜 순종하면서도 기쁜가. 왜 굴복하면서도 기쁜가. 왜냐면 예수님에게서 내 인생 최고의 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 생명과 자유, 긍휼과 나눔, 온유와 겸손, 화평과 용서, 구원과 영원함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그 예수님이 바로 내 목자가 되십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목자. 생명을 걸고 나를 지켜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하지 않습니까. 저자 마태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기록하며, 내 인생에 오신 메시야, 나의 구원자,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을 보며 제 인생도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 생각이 듭니다. 목자를 따라서, 친구를 따라서, 부모님을 따라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부터 이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별을 따라가는 동방박사들과 같아서 때로는 예루살렘이 화려한 것처럼, 홍대앞 유흥가가 화려한 것처럼 세상의 화려함에 때로 길을 잃기도 합니다. 가끔은 그동안의 수고가 덧없고 헛되어 보이기도 하고, 되돌아가기엔 너무나 멀리 와서 돌아갈 수도 없다고 하는, 과연 이것이 정말 최선이었나 생각 들기도 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동방박사들은 인생에서 무엇이 참된 가치인 지 알았고, 어쩌면 그것을 위해 인생을 걸고 모험 같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어디 계시냐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였고, 드디어 유대인의 왕 메시야를 경배하게 되었을 때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이고, 때로는 모험 같은 여행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의 내 인생을 걸어도 될만한 최고의 가치를 찾으셨습니까? 내 인생을 걸어도 될만한 참된 가치를 찾고 그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p.s.좀 쑥스럽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를 따라서 헌신하고 계시는 이디모데, 안나 선교사님가정과 동교 센터 목자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메시지를 올립니다.
요절 | 마태복음 2:11
내 인생 최고의 가치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성탄절을 잘 보내셨습니까? 성탄절은 지났지만, 지난 한해를,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본문 말씀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사실 오늘은 놀랍게도 아주 뻔한 이야기를 마치 새롭고 놀라운 사실처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항상 듣는 이야기고 뻔한 말씀이지만 마치 새롭게 놀라운 사실인양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무색하지 않으니까요.
본문 말씀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여행은 어쩌면 모험에 가깝습니다. 이들이 멀리 수천 km 떨어진 동방에서부터 왔을 때는 도중에 수많은 위험이나 어려움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돈도 들고, 시간도 들고, 위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작정 별을 따라 왔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걸어서 길을 떠날 만큼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아무리 봐도 그들이 먼길 와서 뭔가 대단한 가를 얻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놓고 갔습니다. input 대비 output 이 없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와서 식대, 차비, 기름값도 못 건지고 돌아갔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왔을까요
동방에서 온 이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말 때문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습니다. 버젓이 유대의 왕인 헤롯 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데 이런 말 들으면 소동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럼 이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은 유대인만의 왕일까요? 유대민족의 왕이라고 하면 굳이 멀리 동방에서 목숨걸고 찾아올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헤롯도 아는 것은 유대인의 왕은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 메시야,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유대인의 왕은 세상을 구원할 빛과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생각할 때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전쟁의 역사입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죄다 전쟁에 대한 기록입니다. 피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 권력, 영토를 뺐고 뺏기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압제 속에 고통하였습니다. 이러한 세상 역사를 보고 연구하며 그들은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새 역사를 소망하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피의 전쟁으로부터, 권력자, 부한 자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 전쟁 대신 화평을, 억눌림 대신 자유를 주고, 사나움과 강포함이 아닌 선함과 진리로 다스릴 왕! 인류의 역사 속에 그런 메시야의 평화와 구원의 역사는 칠흙 같은 어둠의 터널 끝 에 보이는 환한 빛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따라온 별은 단순한 별이 아니라 어둔 세상에 비치는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런 그들도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제까지 순수하게 별을 따라왔던 이들이 길을 잃은 까닭은 눈부신 예루살렘의 불빛 때문이 아니었을 까 생각합니다. 가로등 불빛 때문에 밤하늘의 별들을 잘 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곳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헤롯궁 어디에도 유대인의 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별을 따라 찾아갔더니 어느 집 단칸방에서 유대인의 왕을 찾았습니다. 어느 아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갓난 아기였습니다. 이 아기가 유대인의 왕이라니. 당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그들은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아기라면 얼르고 달래주고 축복해주면 될 거 같은데, 경배한 것은 이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역사를 보았습니다. 사람들 위에 올라 서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세상 왕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는 구원자를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헤롯 궁에 있는 상위 몇 %의 사람들이 아닌 그 시대에 가난하고 굶주리고 압제 받던 대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구원자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물이나 선물을 할 때는 생각없이 아무 것이나 하지 않습니다. 받을 사람을 생각하며 준비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 까요. 메시야가 온 인류를 구원하고 세우실 영원한 나라.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피조물이 화목하게 될 소망, 메시야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이룰 용서와 화평의 역사를 생각하며 예물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역사를 기대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메시야가 이룰 역사를 고대하며 그들도 긍휼과 용서와 화평을 행하며 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경배하면서 드렸던 예물대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캠퍼스에도 홍대 땅에도 소동이 있었습니다. UBF 때문이었고 우리 센터 때문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따르는, 바보같기도 하고, 천진난만하기도 한 우리 모임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복음에 대한 순수하게 살아 있는 믿음, 순수한 열정, 별을 따라가는 구도자의 열정과 같은 것이 사실 이 홍대 땅을 소란하게 하였습니다. 그럼 이런 것이 옛날 일인가 현재에도 통하는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열정이 식었다고 하고, 첫사랑이 식었다고 하는 데 열정만으로 할 수 있는 가. 의지로만 할 수 있는 가. 묻고 싶습니다. 사람의 열정과 의지 만이었다고 하면 언젠가는 식어지고 언젠가는 지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이상적인지는 몰라도, 감동이 있었고 그 감동 때문이라고 하면, 정말 그 때 내 인생이 뒤집어지고 세상이 바뀌는 변화가 있었다면. 내 인생을 전부 걸어도 될만한 가치를 찾았다면 현재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씀에 대한 감동이 과거 학생 때가 아니라 5년전, 10년전이 아니라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현재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동방박사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처럼 머나먼 여정 길을 떠나야 했을 까. 무엇이 그들을 가만 있지 못하게 하였을까. 거기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저는 주목해 본 것입니다. 저자 마태는 왜 동방박사들에게 주목하고 있습니까? 내 인생을 뒤집어 놓으신 예수님, 인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최고의 가치가 되신 예수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치 예수님이 태어난 헤롯왕 때처럼 마음이 어두웠습니다. 세상 권세,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없고, 은혜와 긍휼이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았습니다. 무자비함, 이기심 속에 병든 사람으로. 무정하고 무감동하지만 병든지 모르고 살아가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정말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따를만한 최고의 가치였고, 그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한 것으로 내 인생은 기쁘고 만족스럽다고 말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으시대고, 자기를 높이려는 세상 속에서, 화려한 자리 아닌 낮은 자리에 오신 유대인의 왕의 모습 속에서. 정작 마태 자신은 과거 가난하 자, 없는 자의 설움을 떨치고자 세리가 되었지만, 그 가난한 자, 없는 자와 함께 하고자 내려오신 유대인의 왕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돈으로 처바르고 칼로 무력으로 공권력으로 내가 왕이다 주장하는 세상 왕이 아니라 나보다도 연약한 한 아기의 모습이지만 저절로 그 앞에 무릎꿇고 엎드려 경배하게 되는 진정한 왕되신 예수님! 자기를 주장하며 살던 그 때 얻지 못했던 기쁨과 행복을, 오히려 이제는 황금 같은 청춘, 내 시간, 내 인생 다 내려놓고 다 예수님께 드렸지만 오히려 기쁘다. 즐겁다. 마음이 행복하다. 왜 그럴까. 왜 순종하면서도 기쁜가. 왜 굴복하면서도 기쁜가. 왜냐면 예수님에게서 내 인생 최고의 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진리, 생명과 자유, 긍휼과 나눔, 온유와 겸손, 화평과 용서, 구원과 영원함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그 예수님이 바로 내 목자가 되십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목자. 생명을 걸고 나를 지켜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하지 않습니까. 저자 마태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기록하며, 내 인생에 오신 메시야, 나의 구원자,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을 보며 제 인생도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 생각이 듭니다. 목자를 따라서, 친구를 따라서, 부모님을 따라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부터 이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은 별을 따라가는 동방박사들과 같아서 때로는 예루살렘이 화려한 것처럼, 홍대앞 유흥가가 화려한 것처럼 세상의 화려함에 때로 길을 잃기도 합니다. 가끔은 그동안의 수고가 덧없고 헛되어 보이기도 하고, 되돌아가기엔 너무나 멀리 와서 돌아갈 수도 없다고 하는, 과연 이것이 정말 최선이었나 생각 들기도 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동방박사들은 인생에서 무엇이 참된 가치인 지 알았고, 어쩌면 그것을 위해 인생을 걸고 모험 같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어디 계시냐 우리가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였고, 드디어 유대인의 왕 메시야를 경배하게 되었을 때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이고, 때로는 모험 같은 여행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의 내 인생을 걸어도 될만한 최고의 가치를 찾으셨습니까? 내 인생을 걸어도 될만한 참된 가치를 찾고 그 가치를 따라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p.s.좀 쑥스럽지만 인생의 참된 가치를 따라서 헌신하고 계시는 이디모데, 안나 선교사님가정과 동교 센터 목자님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메시지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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