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후리 연합 수양회 보고 및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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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후리 연합 여름 수양회 보고
동교, 인천, 안양, 원천 센터는 2014년 7월 26(토)-29일(화)까지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에 위치해 있는 후리 수양관에서 연합 여름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참석자는 130명이었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주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였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말씀의 은혜가 풍성한 수양회였습니다. 수양회 강사는 신용도(인천), 이기도(안양), 임요한Jr(동교), 정성훈(원천), 김승원(원천), 오범호(인천), 나에녹(동교)목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김승원목자가 전한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 십자가의 사랑을 자신의 간증과 함께 잘 증거했습니다. 강사 한 분 한 분이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권세있게 증거했습니다. 임요한Jr. 목자는 2세로서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증거함으로 장래 말씀의 종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에녹목자님은 주제 3강 말씀을 증거했는데 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 신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둘째, 이 말씀이 은혜가 있었다는 증거로 소감 강사들이 발표한 소감이었습니다. 첫째날 인생 소감은 김경훈(원천), 하디모데(인천), 곽누가(동교)목자들이 발표했고 둘째날은 최정희(안양), 심민섭(인천), 허지선(동교), 셋째날은 최미연(안양), 심예진(안양), 나하경, 김호세아, 노성균목자들이 이사야 53장에 기초한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김호세아 목자님은 5년 만에 깊이 있는 소감을 썼고, 노성균 형제도 5년 만에 자기의 속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양회에 참석한 각 사람의 마음에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 즐겁게 진행된 수양회였습니다. 이번 수양회는 네 센터가 연합해서 함으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통일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안양 센터의 십자가 칸타타는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안양센터의 목자님들이 대부분 참석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노래와 연극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첫째날 박효진 장로님의 특강은 성령의 역사로 변화된 자신과 사형수의 이야기를 증거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살아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 사람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잘 드러냈습니다. 메시지 후에 영상 메시지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수양회가 지루하지 않도록 은혜와 감동을주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4장에 대한 영상 메시지는 이어령 교수의 변화와 그의 딸 고 이민아목사의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성령의 역사로 절대고독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동교센터에서는 대학생들로서 이믿음, 김한올, 노성균, 윤혜림, 석다혜 자매가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JBF에서 12명이 참석했습니다. 허지선, 나하경 자매가 대표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JBF는 장기자랑도 섬겼습니다. 일대일 양을 얻기가 어려운 때에 이들이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양회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기도하였습니다.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가르쳐야 하고,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씨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소망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잡은 말씀은 마가복음 11:22,2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후 베다니로 물러가셨다가 이튿날 아침에 성전으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전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채 잎사귀들이 나뒹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쳤습니다. "선생님 이것 보세요.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와!" 그 싱싱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하루 밤 사이에 뿌리로부터 말라버리다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놀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부러웠습니다. 그런 권세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비결을 알고 싶었습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언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히11:1,3).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나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만드신 만물 속에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고 계십니다. 비온 후 맑게 개인 파란 하늘과 뭉개구름, 이름 모를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 거품을 머금고 힘껏 달려와서는 말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파도들 등,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믿음은 이 창조주를 하나님을 마치 눈에 뵙는 것 같이 그 앞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 나라, 주님의 부활과 재림, 심판 등 장래 일들도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의지하고 살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자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구체적인 방향을 주고 할 일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사람은 지갑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때 인간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 가운데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자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내면이 성숙해지고 강해지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화가 나무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을 때 그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크신 권능이 어디서 오는가였습니다. 그는 늘 앞에 나서서 큰 소리는 잘 쳤지만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에게 능력만 있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고 모든 제자들이 자신에게 꾸뻑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배우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위대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부터 잘 되지 않을 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과 우리에게 무화과나무를 뿌리 채 마르게 할 수 있었던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능히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14:12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며 반석에서 샘물이 흐르게 하시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실거야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데’ 하며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불신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과 내 생각 속의 하나님과의 괴리감을 가리킵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의 저수지와 우리를 차단시키는 높은 산과 같습니다. 이 산을 옮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로 흐르는 통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측량할 수 없는 저수지와 같습니다. 저수지의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이프가 집까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파이프가 굵으면 굵을수록 많은 양의 물이 흐르듯이, 믿음의 통로가 굵으면 굵을수록 주님의 능력을 많이 덧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다는 유대인의 속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산은 그 특징이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산을 움직이는 믿음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실 때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위대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을 가능케 한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늙고 지치고 쇠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연약함과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로마를 정복코자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셋집에서 위대한 1:1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후에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빌4:13).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의 믿음대로 거대한 로마를 복음화시키시고 로마를 통하여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자신은 능력이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통하여 그가 시도한 일과 그보다 더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여러가지 약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었던 비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누구든지”를 강조하심으로 누구나 하나님을 믿으면 산을 옮기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영웅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계적인 인간조건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인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태산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 목자들에게는 변화되지 않는 양이 태산과 같이 보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고질병이 태산이 되기도 하고,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 어학공부가 태산이 되기도 합니다. 고정관념이 우리의 태산이 됩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하여 우리의 한계를 짓게 하는 태산을 보았습니다. 양들을 초청하는 것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오겠다고 했던 양들이 하루 이틀 전에 약속이 있어서 못 오겠다고 했습니다. 힘이 빠졌습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면 아예 양들을 수양회에 초청하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참석한 분들은 많은 은혜를 받고 주님과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내적인 의심과 싸워 이겨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믿지 못하면 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큰 일을 하고자 하면 마음 속에 찾아오는 것이 의심입니다.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태산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게 되어 버립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연약한 생각, 운명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 두려움이 엄습하여 나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심들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심리현상이 아닙니다.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에 의심의 독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에 무서운 파문이 일어나 마침내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의심의 독화살이 마음에 꽂히게 되면 어떤 영웅이나 천하 장사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사단이 심는 의심과 싸우는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의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 되리라." 기도할 때 의심을 이기게 됩니다. 기도할 때 믿음이 생기고 또 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신 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기도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바늘과 실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마음 속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과 싸워 이김으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기도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를 다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하고는 잊거나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을 때 기도를 중단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가장 베스트의 때에 베스트의 방법으로 응답해 주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요한은 확신 가운데 말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1서4:14,15)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받은 바 은혜를 간직하고 감사합시다. 수양회에 오지 못한 양들과 일대일 관계성을 회복합시다. 또한 학생 복음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합시다.
동교, 인천, 안양, 원천 센터는 2014년 7월 26(토)-29일(화)까지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에 위치해 있는 후리 수양관에서 연합 여름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참석자는 130명이었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주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였습니다. 이번 수양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말씀의 은혜가 풍성한 수양회였습니다. 수양회 강사는 신용도(인천), 이기도(안양), 임요한Jr(동교), 정성훈(원천), 김승원(원천), 오범호(인천), 나에녹(동교)목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김승원목자가 전한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 십자가의 사랑을 자신의 간증과 함께 잘 증거했습니다. 강사 한 분 한 분이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권세있게 증거했습니다. 임요한Jr. 목자는 2세로서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증거함으로 장래 말씀의 종으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에녹목자님은 주제 3강 말씀을 증거했는데 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서 신자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둘째, 이 말씀이 은혜가 있었다는 증거로 소감 강사들이 발표한 소감이었습니다. 첫째날 인생 소감은 김경훈(원천), 하디모데(인천), 곽누가(동교)목자들이 발표했고 둘째날은 최정희(안양), 심민섭(인천), 허지선(동교), 셋째날은 최미연(안양), 심예진(안양), 나하경, 김호세아, 노성균목자들이 이사야 53장에 기초한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김호세아 목자님은 5년 만에 깊이 있는 소감을 썼고, 노성균 형제도 5년 만에 자기의 속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수양회에 참석한 각 사람의 마음에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셋째, 즐겁게 진행된 수양회였습니다. 이번 수양회는 네 센터가 연합해서 함으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통일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안양 센터의 십자가 칸타타는 완성도가 높았습니다. 안양센터의 목자님들이 대부분 참석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노래와 연극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첫째날 박효진 장로님의 특강은 성령의 역사로 변화된 자신과 사형수의 이야기를 증거했습니다. 그의 강의는 살아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 사람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잘 드러냈습니다. 메시지 후에 영상 메시지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수양회가 지루하지 않도록 은혜와 감동을주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4장에 대한 영상 메시지는 이어령 교수의 변화와 그의 딸 고 이민아목사의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성령의 역사로 절대고독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동교센터에서는 대학생들로서 이믿음, 김한올, 노성균, 윤혜림, 석다혜 자매가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JBF에서 12명이 참석했습니다. 허지선, 나하경 자매가 대표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JBF는 장기자랑도 섬겼습니다. 일대일 양을 얻기가 어려운 때에 이들이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양회 이후에 하나님의 역사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기도하였습니다.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였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가르쳐야 하고,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씨들이 있는 한 하나님의 역사는 소망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잡은 말씀은 마가복음 11:22,2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후 베다니로 물러가셨다가 이튿날 아침에 성전으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전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채 잎사귀들이 나뒹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쳤습니다. "선생님 이것 보세요.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와!" 그 싱싱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하루 밤 사이에 뿌리로부터 말라버리다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놀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부러웠습니다. 그런 권세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비결을 알고 싶었습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언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히11:1,3).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나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만드신 만물 속에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고 계십니다. 비온 후 맑게 개인 파란 하늘과 뭉개구름, 이름 모를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 거품을 머금고 힘껏 달려와서는 말없이 사라지는 수많은 파도들 등,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게 됩니다. 믿음은 이 창조주를 하나님을 마치 눈에 뵙는 것 같이 그 앞에 사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 나라, 주님의 부활과 재림, 심판 등 장래 일들도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질이나 권세를 의지하고 살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자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구체적인 방향을 주고 할 일을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돈을 벌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이런 사람은 지갑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할 때 인간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 가운데 살아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립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할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자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내면이 성숙해지고 강해지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화가 나무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을 때 그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의 크신 권능이 어디서 오는가였습니다. 그는 늘 앞에 나서서 큰 소리는 잘 쳤지만 능력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에게 능력만 있다면 야고보와 요한이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고 모든 제자들이 자신에게 꾸뻑 죽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배우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위대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부터 잘 되지 않을 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과 우리에게 무화과나무를 뿌리 채 마르게 할 수 있었던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능히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요14:12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주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을 할 것이요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며 반석에서 샘물이 흐르게 하시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실거야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데’ 하며 우리의 합리적인 사고로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불신이란 전능하신 하나님과 내 생각 속의 하나님과의 괴리감을 가리킵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능력의 저수지와 우리를 차단시키는 높은 산과 같습니다. 이 산을 옮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로 흐르는 통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측량할 수 없는 저수지와 같습니다. 저수지의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파이프가 집까지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파이프가 굵으면 굵을수록 많은 양의 물이 흐르듯이, 믿음의 통로가 굵으면 굵을수록 주님의 능력을 많이 덧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지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다는 유대인의 속담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산은 그 특징이 요지부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산을 움직이는 믿음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하실 때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위대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을 가능케 한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늙고 지치고 쇠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연약함과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계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로마를 정복코자 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셋집에서 위대한 1:1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후에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빌4:13).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의 믿음대로 거대한 로마를 복음화시키시고 로마를 통하여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자신은 능력이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통하여 그가 시도한 일과 그보다 더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믿음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여러가지 약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했던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었던 비범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누구든지”를 강조하심으로 누구나 하나님을 믿으면 산을 옮기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창조한 믿음의 영웅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계적인 인간조건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인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태산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 목자들에게는 변화되지 않는 양이 태산과 같이 보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고질병이 태산이 되기도 하고,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 않는 어학공부가 태산이 되기도 합니다. 고정관념이 우리의 태산이 됩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하여 우리의 한계를 짓게 하는 태산을 보았습니다. 양들을 초청하는 것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오겠다고 했던 양들이 하루 이틀 전에 약속이 있어서 못 오겠다고 했습니다. 힘이 빠졌습니다. 이런 일을 여러 번 겪고 나면 아예 양들을 수양회에 초청하고자 하는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결코 절망하거나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이번 수양회에 참석한 분들은 많은 은혜를 받고 주님과의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큰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내적인 의심과 싸워 이겨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믿지 못하면 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큰 일을 하고자 하면 마음 속에 찾아오는 것이 의심입니다.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태산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게 되어 버립니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연약한 생각, 운명적인 생각, 패배적인 생각, 두려움이 엄습하여 나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러면 이러한 의심들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심리현상이 아닙니다.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이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마음에 의심의 독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에 무서운 파문이 일어나 마침내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의심의 독화살이 마음에 꽂히게 되면 어떤 영웅이나 천하 장사도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 순간 사단이 심는 의심과 싸우는 영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의심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 되리라." 기도할 때 의심을 이기게 됩니다. 기도할 때 믿음이 생기고 또 강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신 후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기도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기도는 바늘과 실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마음 속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과 싸워 이김으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을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기도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를 다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하고는 잊거나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을 때 기도를 중단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가장 베스트의 때에 베스트의 방법으로 응답해 주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 요한은 확신 가운데 말했습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1서4:14,15)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받은 바 은혜를 간직하고 감사합시다. 수양회에 오지 못한 양들과 일대일 관계성을 회복합시다. 또한 학생 복음 역사를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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