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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는다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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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성자
댓글 0건 조회 83회 작성일 14-09-20 13:08

본문

하나님을 찾는 다는 건 뭘까?

말씀 / 역대하 31:1~31:21 (21)
요절 /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21)

 히스기야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서 하니님을 찾았다고 하였숩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수종드는 일은 번제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드린 십일조, 성물을 받아 관리하고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나눠주어 이들이 직무를 하게끔 하는 일입니다. 우리로 치면 예배드리고, 기도의 종, 말씀의 종을 세우고 , 십일조와 헌금을 받아 스텝목자님, 풀타임 목자님의 필요한 물질을 드리고, 센터를 운영하는 일입니다. 이일들은 꽤 반복적으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여기서, 이런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다면 우리가 하는 일들이 달라질 수 있을 까요?

 율법이나 계명들은 꼭 지켜야 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십계명의 경우 우상숭배하지 말라. 안식일을 지켜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꼭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들은 하라, 하지 말라 는 명령으로 지키명 되는 것인데 여기서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찾는 다면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는 최초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따먹지 말라’ 는 말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따먹지 않으려면 만지지 말아야 하고, 만지지 않으려면 보지 말아야 합니다. 만지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려면 반경 10m, 50m 에 울타리를 치고 높은 담장으로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5년, 10년, 50년, 10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담장 너머는 신비의 영역이 됩니다. 담장 너머 도대체 뭐가 있길래 저렇게 막아놓았지? 그 금단의 벽을 넘으면 신세계가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보았을 때 이런 대단한 것을 왜 못먹게 하였는 가? 하며 결국 따먹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이 계명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 데, 왜 그렇지? 하나님은 왜 따먹지 잘라고 하셨지? 그 하나님은 누구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따먹지 말라 하신 것은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선악을 알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아 하나님께로 가서 물어보면 되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히스기야는 왜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때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기 전 아하스가 유다 왕이었을 때, 아람과 이스라엘 군대가 유다를 공격하여 크게 살육당하였습니다. 유다의 용사 십이만명이 죽었습니다. 에돔 사람이 유다를 쳤고, 앗수르에 도움을 청했으나 앗수르가 도와주기는 커녕, 도리어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의 재물을 가져다가 앗수르 왕에게 다 퍼서 주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백성은 죽고 사로잡혀 갔습니다. 이제 아하스는 죽고 아들 히스기야가 왕에 올랐습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만약 힘이 없어서 이렇게 당하고 사는 구나 생각하면 힘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외교력의 실패라고 하면 외교에 더 힘을 써야 할 것이니다.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해결책이 달라집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한국 기독교도 우리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히스기야는 이러한 난국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왜 진노하셨습니까?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왜 버렸습니까? 하나님이 필요 없다, 짐스럽다, 여호와가 도움이 안되고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방해만 되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담스런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등을 돌렸습니다. 도리어 다른 것이 내게 도움된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여호와를 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다를 향한 여호와의 진노하심을 가라앉히고자 했습니다. 그럼 관계를 끊으면 되지 하나님은 왜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다 백성이 돌이키길 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정말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구원이시다 생각하였고, 간절히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가 강력한 군대도 아니요, 외교력도, 머릿수를 늘리는 것도 아니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이 진정한 도움이 되시고 구원이 되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냥 잘 보이기 위해서 이것 저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찾고, 구하고자 했습니다.

세 번째 질문, 히스기야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서 그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유대의 왕,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 조직과 군대를 정비하는 일이 먼저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행하는 모든 일은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 그리고 율법이나 계명을 따르는 일이었고 거기서 그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럼 히스기야는 왕이지만 자신을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을 하는 사람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따라 살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왕으로서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도움이 되시고 구원이 되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자로서 하나님의 전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장소였습니다. 그 곳에서 히스기야가 찾은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를 방해하는 쓸데없는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다를 공격하고 노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편지를 보내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중 어떤 사람들은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이스라엘 사람들 몇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와서 유월절을 행하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고치셨고,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백성들 스스로 여러 성읍에 있는 주상들을 깨뜨리고 우상을 제거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자로서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을 보니 이들은 풀타임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인데 그동안 이들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생계가 보장받지 못했습니다. 성전을 섬기고 의식을 행하고 수종들려면 물질이 필요한데 이런 것들을 챙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레위 사람들을 격려하고, 먼저 자신의 재산 중에 얼마를 정하여 쓰도록 했습니다. 백성을 명령하여 풀타임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몫의 음식을 주고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히스기야가 찾은 하나님은 헌신하는 이들의 생계를 보장해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을 때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자신의 존재가 달라졌습니다. 한 나라를 군림하는 왕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과 필요을 채움받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풀타임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더욱 율법에 힘쓰고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달라졌습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일 센터 청소도 하고, 마음을 모아 새벽기도도 할 수 있고, 다음주 풀타임 스텝 후보 목자님들이 우리 센터에서 훈련을 받는 데 이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때로는 매우 정기적으로 일어나고, 또는 매우 이벤트성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일이라면 그런 일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서 기쁘기도 하고 안좋은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 속에
서 하나님을 찾으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찾지 않는 다면 우리가 하는 성경공부, 예배, 우리가 하는 일들이 언젠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무의미하게 되고, 결국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그 속에 의미가 있게 되고, 히스기야처럼 그 하는 일들이 형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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