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창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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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동교 센타 목자님들께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목자님들의 든든한 기도 지원가운데 시작한 선교 생활도 이제1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 동안 저의 모든 한걸음 한걸음에 동행하시며 저를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키우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지난 5월 9-11일에 봄수양회가 있었습니다. 양들 안에 말씀 역사가 있고 많은 열매들이 맺힌 수양회여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바로 1년 전 독일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참석한 봄수양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에도 불구하고 막막한 현실앞에 눈물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1년 동안 자신안에 아무런 성장도 열매도 없는 것 같아 많이 무기력해 있었는데, 이번 창세기 15장 말씀을 통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저를 ‚독일 지성인들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친히 이루실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이번 수양회에서는 환경을 예비하는데 동역케 되어 감사했습니다. 타이틀 제작과 싱어롱에도 참여하고, 자매 동역자들과 워십댄스도 섬겼습니다. *^^*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모두 서툴고 동작도 다 제각기였지만 준비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서로가 마음을 열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번에 3명의 형제 자매님들이 인생소감을 발표하셨는데 그 중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이 한편 있어 같이 첨부합니다. 이분을 볼 때 하나님이 친히 각 사람의 인생에 역사하시며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소원있는 양들을 찾고 찾아 섬겨야겠다는 소원도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이 형제님을 칼스루에 UBF의 조상으로 굳게 세워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저는 현재 독일어 코스에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원에서 했던 연구주제를 다루는 곳이 많지 않고 하이델베르크 근처에는 더욱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합당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나고나니 목자님들, 사모님들, JBF, CBF 까지 모두 많이 많이 보고싶습니다. 모두들 영육간에 강건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매주 은혜로운 마태복음 말씀 허락해주시고 올해 홍대 제자 양성 역사를 크게 축복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름 수양회 말씀 역사, 성령의 역사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주안에서 김글로리아 올림
인생소감
이름: Tobias Hergert (Karlsruhe Univ. 지구물리 10학기)
지구: 독일 Karlsruhe
발표: 하이델베르크, 만하임, 칼스루에, 슈트트가르트, 프랑크푸르트지구 연합
봄수양회에서 (2003년 5월10일)
장소: Wildberg 수양관(슈바르츠 숲속에 있는 빌드베르크)
제목: 구원의 길로 다시 인도하신 하나님
요절: 시편: 50편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저의 이름은 토비아스 헤르거트입니다. „토비아스“의 뜻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입니다. 저는 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와 같으심을 자주 경험하였습니다. 제 인생소감은 3 Part로 나눠져 있습니다.
Part 1: 하나님과 함께한 어린시절
Part 2: 이론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실제는 하나님 없이 산 청소년 시절
Part 3: 하나님을 위한 삶
Part 1: 하나님과 함께한 어린시절
저는 1978년 남독일 슈베비쉬 알브(독일 경건주의가 살아 남아있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믿는 분들이라 저는 그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들의 보호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익힌 첫 단어는 „아멘“이었습니다. 어린이로서 저는 그림 성경이야기를 즐겨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면 언제나 굉장히 기뻐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10살 정도 되었을 때 매일 성경읽기를 시작하였고 14살에 견신 성사(청소년들이 받는 성례전)를 받았습니다. 견신 성사때 받은 말씀은 예레미아 32장 17절 하반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였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저는 인생을 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도록 기도했으며, 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한다는 것이 진실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또 각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랐고, 또 결정적으로 이를 실행할 의지와 용기가 없었습니다.
Part 2: 이론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실제는 하나님없이 산 청소년 시절
저는 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차 다른 많은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포츠입니다. 저는 유년기부터 아주 기꺼이 육상 경기에 참여하여 빠른 다리로 많은 우승의 감격을 누렸고 이를 아주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상장들과 저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오려서 제 방에 걸어 놓았습니다. 언젠가는 아주 위대한 스포츠맨이 될 것이라고 꿈도 자주 꾸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저는 제 이름이 생명책에 적히는 것보다 올해의 최고 선수 리스트에 실리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를 마음으로 인정한 적은 결코 없으나 실제로는 그러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욕구가 계속 따라다녀 사람들 앞에 뭐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10학년 때 (독일은 초등학교 4년, 중고등 9년 합쳐서 13학년제 입니다.) 우리 가족은 두번째 이사를 했습니다. 새 급우들은 지금까지의 친구들과 비교하면 아주 능력있고, 교양이 뛰어났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뭔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들에 비교하면 저는 지금까지 아주 적게 노력하며 살았고, 상당히 처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번에 뛰어난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명예심이 살아나 가능한 한 우수한 학생이 되고자 했습니다.
한번은 불신자 친구와 신앙에 관해 말했습니다. 또 한번은 다른 친구가 신앙에 관하여 질문해 왔습니다. 두번 다 토론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저보다 토론에 훨씬 뛰어났던 그들로 인해 저는 멍청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론 더 이상 챙피하게 신앙에 관해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을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중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13학년) 해병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정말 사나이(진정한 남자 – 직역)인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다 합격하였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는 졸장부임이 드러났습니다. 혹시 누가 볼까봐 성경읽기도 게을리 하였습니다. 군 동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인생문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몇 잔의 맥주를 비우며 밤이 늦도록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한 동료가 제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해왔는데 저는 그에게 단지 빗나가는 대답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결코 고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해야할지 결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제게 항상 아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래도 저를 목사로서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저를 설득하셨고 저는 그 인용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떻게 당신이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가? (How do you know that you are not called?)“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에 반대할 만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좋아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기 원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상당한 확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신앙인이긴 하나 그 이상은 아닌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마침내 칼스루에 대학에서 지구물리학 전공을 시작하였고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더이상 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학사과정을 마치고 곧 석사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은 학사졸업은 없고, 석사졸업만 있음) 그러나 조금씩 자기 절제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더 이상 그렇게 많이 공부할 것이 없어 학생시절의 여유있는 다른 면을 경험해 볼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공 공부를 게을리했고 점차로 전공 공부에서 더 이상 만족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전공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명한 방향이 없었고, 졸업 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해햐할지 의문이었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삶의 의욕 또한 저하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한층 더 열심히 했는데, 스포츠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적당히 살며 여기저기 파티를 찾아 다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맥주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 다음날 강의를 들으러 갈 수 없을 만큼 되었습니다.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과의 저의 관계성도 변해 갔습니다. 점차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저는 반복하여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제 자신에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누군가가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으나 저는 이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선한 일이라곤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극적으로 가능한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 안에 정욕이 증가하여 자위행위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공허함이 커져 갔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방향을 잃게 하는 안개 속에 싸여 사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는 제인생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이 가능할 것이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게 지금 상황은 아주 정상인 듯 보였습니다. 여전히 성경을 읽고, 매일 기도하며, 가장 신실한 예배 참석자일지라도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와같음이 됨이 어찌 가는 하단 말인가?“ 저는 다른 성도들과도 아무런 영적인 교제가 없었습니다. 예배 참석자 중에 저는 노인이 아닌 극히 소수의 젊은이중의 하나였습니다. 목사님은 가능한 한 모든 주제에 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선 거의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성경읽기도 철저히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읽은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향이 되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네, 벌써 다 아는 것이네“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중생활은 제게 양심의 가책을 주었습니다. 저는 저의 죄를 다른 사람의 죄보다 더 흉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만 더 나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저에 대해 실망했고, 만족할 수도 없었으며 저 스스로를 정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에 대해 „이따위 게으르고, 잠자는 크리츠천이 있단 말인가?“ 자학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보았고, 인생의 분명한 목표도 또 동기도 적었으며 허무하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젊은이가 이토록 벌써 인생에 피곤해 질 수 있단 말인가?“
몇해 전 제 눈이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주로 실명이 되게하는 병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후 첫해는 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또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차 가로등 기둥을 향해 걷거나, 돌에 걸려 넘어지고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실명하게 된다 말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취직 할 수 있을까?” ”독립성을 잃는 것은 아닌가?” “어떤 여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어할까?” ”더이상 읽을 수 없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등등 큰 근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의 미래에 대해 어둡고 캄캄한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악한 감정은 갖지 않았지만 자기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또 이것이 무엇을 위해 좋단 말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대학 7학기 때(지금부터 1년 반전) 안과 의사는 제게 권면했습니다 “자네에 긴급히 충고하는데 공부를 중단하고, 다른 것을 찾아보게나. 대학 공부를 끝내도 자네 눈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네.” 저는 그의 말이 악한 의도가 아니라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단 대학 공부는 계속 했습니다. 하지만 의욕이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마침내는 전공 공부를 위해 더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스포츠를 하던가 몇시간씩 방에 틀어박혀 공상에 빠져있곤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자주 제 자신에 대해, 지난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때 주위에 테두리를 그어 놓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저를 발견하였습니다. 제 안에 누구에게 수학과외를 시켜주던가 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져야겠다는 소원이 생겼고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방향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또 제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하여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이를 알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는 학생식당(Mensa–멘자)에서 Esther Kim (김에스더) 선교사님으로부터 성경읽기(공부)와 주일예배에 초청받았습니다. 저는 우선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에스더 선교사님은 눈에 띄도록 행복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예수님을 아주 사랑하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제 누이의 이름 역시 에스더입니다. 제가 그 곳에 한번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이 종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저는 에스더 선교사님의 가정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예수님이 이들의 중심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아주 기뻤습니다. 첫 주일 예배는 믿음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제게 더이상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임스 김 선교사님과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다시 올바로 근본적으로 읽게되어 기뻤습니다. 제임스 선교사님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저의 귀가 밝아졌습니다. 이는 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는 진정으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두달 후 2002년 에링어펠트성 유럽 여름수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세지, 음악 연주, 사람들의 친절함과 헌신에 크게 감동되어 자꾸만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임을 배웠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이제부터 다시 성경을 정말 집중하여 깨어서 읽으며 무엇보다 성경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으로 읽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특별히 에베소서 4장17부터24절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서서히 한 말씀, 한 말씀이 저의 상황을 적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안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마치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며, 무지속에 완악한 마음으로 죄에 무감각하고, 욕심과 정욕에 빠져있었습니다. 처음엔 “내가 지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지?”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저의 모든 것이 말씀에 꼭 정확히 씌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제게 이 상황에서 이것을 말씀하기 원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새출발하도록 하나님께서 촉구하시며 초청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진실로 살기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Part 3: 하나님을 위한 삶
이날 저녁 이후부터 저는 제 친구들도 예수님을 만나도록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다시금 영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행복을 찾아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하고, 수고하며, 무의미가운데 무력해져 버린 많은 사람들이 불쌍히 보였습니다.
영적인 질서를 다시 찾은 후 이제는 대학공부를 위한 방향을 찾아야 했습니다. 에스더 선교사님은 ‚제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험준비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제 영광을 위해서만 공부했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시험보기 전날 에스더 선교사님은 제게 선교사님의 아들 제임스가 하나님께 '시험보는 동안 그의 부족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두 눈을 감아 주도록’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이상한 소원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니어 제임스에게 제 시험이 그렇게 중요하다니 기뻤습니다. 다음날 시험을 보는데 집중력이 떨어져 몇몇의 힌트를 받기 전(구술시험)에는 더이상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갑자기 교수님이 배석한 시험감독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한 쪽 눈을 감아줍시다.“ 시험감독관이 교수님께 대답했습ㄴ디ㅏ. „우리 두 눈을 다 감아줍시다“ 그러자 교수님은 „오케이, 우리 이 학생에게 A학점을 줍시다!“ 하였습니다. (독일에선 1점이라고 함, 1점부터 6점까지에서 1점이 최고 점수임) 저는 „이게 정말 진짜일 수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저의 부족함에 대해 교수님의 두 눈을 감게 하셨고, 또 스스로 두 눈을 감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난 해 Monbachtal(몬바흨탈) 가을 수양회에서 저는 예수님이 저의 선한 목자이신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아시며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심지어 저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신 사건이 저를 감동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저도 방황하는 양들의 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선 석사논문을 위한 테마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무엇으로 결정해야 할 지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힌트를 주시도록 기도하였지만 어떤 테마를 선택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몇 주가 흘러갔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주 인상적인 방법으로 왜 아무런 힌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훈련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저의 마음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곧 분명한 방향이 차례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아주 기뻤으며 무슨 테마를 결정해야할지 더 이상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임스 선교사님은 석사논문을 마태복음 6장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에 기초해서 쓸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한 학생과 성경공부를 시작하고자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사람에 대해 두려움이었습니다. 지난해 동안 어느 정도 수줍음이 줄어들었지만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전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은둔의 삶을 사는 것을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타인과 말을 해야만 하는 어떠한 환경이든 다 피하고자 했습니다. 만약에 예전에 제가 이곳 이자리에 섰었더라면 아마도 저는 바닥으로 점점 가라 앉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게 „두려워하지마, 여기서 아무도 널 물어 뜯지 않아“라는 말로 위로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늘 눈에 띄게 두려워하고 있는 인상을 퍼뜨리고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르는 사람에 말을 걸어야 했고, 또 걸고 싶었습니다. 발이 아파올 때 까지 꾸준히 수시간 동안이나 캠퍼스에서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한 학생을 성경공부에 초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결코 해낼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한 학생에게조차도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자꾸만 실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확증하셨건만 제 자신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시편 56편 10절에서 13절을 통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눈물이 나오도록 저를 아주 사로잡았고 저는 이 구절을 암송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나 여전히 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 다른 성경 말씀으로 격려하셨건만 유감스럽게도 허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요한계시록의 한 말씀으로 제게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 이날 비로서 저는 저의 자아를 극복하고 두명의 학생들에게 말을 걸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속에 사랑이 되살아나게 되었고 학생들을 더이상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한 사람이 „예“하며 초청에 응답하길 소망합니다. 초청 역사를 섬기며 행동하는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머무는 최선의 길임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말씀에 대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매일 즐거운 기대 가운데 스스로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은 무엇을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실까?“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기꺼이 또 자주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기쁨과 감사와 방향이 되며 저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고 겸손히 읽고자 하며, 참으로 깨닫고 기억하며, 저 자신과 연관시키고자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 눈병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를 통해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하나님은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저를 통해 일하실 계획이 있으십니다. 이를 통해 제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제 스스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돕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인생의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도록 드리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제게 이를 감당할 인내와 힘을 주시어 저를 존귀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은혜로 다시 기쁨과 소망과 확신을 회복케 하셨고, 저로 인생의 의미와 위대한 미래를 갖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므로 저는 아무런 근심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언젠가는 영원히 그분과 함께 하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가 이곳에서 그분을 위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상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헛되지 않습니다. 굉장한 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와 인내와 자비의 하나님께, 또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많은 사랑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저의 주님이시라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제가 학생들 가운데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그들의 목자요 성경선생이 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며 예수님을 섬기고 감사하겠습니다.
한마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목자님들의 든든한 기도 지원가운데 시작한 선교 생활도 이제1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 동안 저의 모든 한걸음 한걸음에 동행하시며 저를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키우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지난 5월 9-11일에 봄수양회가 있었습니다. 양들 안에 말씀 역사가 있고 많은 열매들이 맺힌 수양회여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바로 1년 전 독일에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참석한 봄수양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격에도 불구하고 막막한 현실앞에 눈물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1년 동안 자신안에 아무런 성장도 열매도 없는 것 같아 많이 무기력해 있었는데, 이번 창세기 15장 말씀을 통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저를 ‚독일 지성인들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친히 이루실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비전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이번 수양회에서는 환경을 예비하는데 동역케 되어 감사했습니다. 타이틀 제작과 싱어롱에도 참여하고, 자매 동역자들과 워십댄스도 섬겼습니다. *^^*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모두 서툴고 동작도 다 제각기였지만 준비하는 동안 내내 즐거웠고 서로가 마음을 열고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번에 3명의 형제 자매님들이 인생소감을 발표하셨는데 그 중에서 한글로 번역된 것이 한편 있어 같이 첨부합니다. 이분을 볼 때 하나님이 친히 각 사람의 인생에 역사하시며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소원있는 양들을 찾고 찾아 섬겨야겠다는 소원도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이 형제님을 칼스루에 UBF의 조상으로 굳게 세워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저는 현재 독일어 코스에 다니면서 박사과정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원에서 했던 연구주제를 다루는 곳이 많지 않고 하이델베르크 근처에는 더욱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합당한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도부탁드립니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나고나니 목자님들, 사모님들, JBF, CBF 까지 모두 많이 많이 보고싶습니다. 모두들 영육간에 강건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매주 은혜로운 마태복음 말씀 허락해주시고 올해 홍대 제자 양성 역사를 크게 축복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여름 수양회 말씀 역사, 성령의 역사 위해서도 기도드립니다.
주안에서 김글로리아 올림
인생소감
이름: Tobias Hergert (Karlsruhe Univ. 지구물리 10학기)
지구: 독일 Karlsruhe
발표: 하이델베르크, 만하임, 칼스루에, 슈트트가르트, 프랑크푸르트지구 연합
봄수양회에서 (2003년 5월10일)
장소: Wildberg 수양관(슈바르츠 숲속에 있는 빌드베르크)
제목: 구원의 길로 다시 인도하신 하나님
요절: 시편: 50편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저의 이름은 토비아스 헤르거트입니다. „토비아스“의 뜻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입니다. 저는 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와 같으심을 자주 경험하였습니다. 제 인생소감은 3 Part로 나눠져 있습니다.
Part 1: 하나님과 함께한 어린시절
Part 2: 이론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실제는 하나님 없이 산 청소년 시절
Part 3: 하나님을 위한 삶
Part 1: 하나님과 함께한 어린시절
저는 1978년 남독일 슈베비쉬 알브(독일 경건주의가 살아 남아있는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믿는 분들이라 저는 그 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며, 그분들의 보호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익힌 첫 단어는 „아멘“이었습니다. 어린이로서 저는 그림 성경이야기를 즐겨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은 참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응답하실 때면 언제나 굉장히 기뻐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능력과 사랑의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10살 정도 되었을 때 매일 성경읽기를 시작하였고 14살에 견신 성사(청소년들이 받는 성례전)를 받았습니다. 견신 성사때 받은 말씀은 예레미아 32장 17절 하반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였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저는 인생을 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거룩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도록 기도했으며, 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한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한다는 것이 진실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또 각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몰랐고, 또 결정적으로 이를 실행할 의지와 용기가 없었습니다.
Part 2: 이론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실제는 하나님없이 산 청소년 시절
저는 제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차 다른 많은 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포츠입니다. 저는 유년기부터 아주 기꺼이 육상 경기에 참여하여 빠른 다리로 많은 우승의 감격을 누렸고 이를 아주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상장들과 저에 관한 신문기사들을 오려서 제 방에 걸어 놓았습니다. 언젠가는 아주 위대한 스포츠맨이 될 것이라고 꿈도 자주 꾸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저는 제 이름이 생명책에 적히는 것보다 올해의 최고 선수 리스트에 실리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를 마음으로 인정한 적은 결코 없으나 실제로는 그러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욕구가 계속 따라다녀 사람들 앞에 뭐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했습니다.
10학년 때 (독일은 초등학교 4년, 중고등 9년 합쳐서 13학년제 입니다.) 우리 가족은 두번째 이사를 했습니다. 새 급우들은 지금까지의 친구들과 비교하면 아주 능력있고, 교양이 뛰어났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뭔가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들에 비교하면 저는 지금까지 아주 적게 노력하며 살았고, 상당히 처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번에 뛰어난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있는 명예심이 살아나 가능한 한 우수한 학생이 되고자 했습니다.
한번은 불신자 친구와 신앙에 관해 말했습니다. 또 한번은 다른 친구가 신앙에 관하여 질문해 왔습니다. 두번 다 토론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저보다 토론에 훨씬 뛰어났던 그들로 인해 저는 멍청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론 더 이상 챙피하게 신앙에 관해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을 하나님의 인정보다 더 중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13학년) 해병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정말 사나이(진정한 남자 – 직역)인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체력을 요구하는 것은 다 합격하였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용기가 없는 졸장부임이 드러났습니다. 혹시 누가 볼까봐 성경읽기도 게을리 하였습니다. 군 동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인생문제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몇 잔의 맥주를 비우며 밤이 늦도록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한 동료가 제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해왔는데 저는 그에게 단지 빗나가는 대답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결코 고백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해야할지 결정할 때가 되었습니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제게 항상 아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래도 저를 목사로서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하여 저를 설득하셨고 저는 그 인용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어떻게 당신이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지 알 수 있는가? (How do you know that you are not called?)“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에 반대할 만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좋아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기 원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고 상당한 확신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신앙인이긴 하나 그 이상은 아닌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마침내 칼스루에 대학에서 지구물리학 전공을 시작하였고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더이상 저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학사과정을 마치고 곧 석사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독일은 학사졸업은 없고, 석사졸업만 있음) 그러나 조금씩 자기 절제가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더 이상 그렇게 많이 공부할 것이 없어 학생시절의 여유있는 다른 면을 경험해 볼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공 공부를 게을리했고 점차로 전공 공부에서 더 이상 만족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전공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분명한 방향이 없었고, 졸업 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해햐할지 의문이었습니다. 제게는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삶의 의욕 또한 저하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을 한층 더 열심히 했는데, 스포츠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적당히 살며 여기저기 파티를 찾아 다녔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맥주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 다음날 강의를 들으러 갈 수 없을 만큼 되었습니다.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과의 저의 관계성도 변해 갔습니다. 점차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되었습니다. 저는 반복하여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제 자신에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누군가가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으나 저는 이를 외면해 버렸습니다. 선한 일이라곤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또 소극적으로 가능한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 안에 정욕이 증가하여 자위행위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제 안에 공허함이 커져 갔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방향을 잃게 하는 안개 속에 싸여 사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에는 제인생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이 가능할 것이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게 지금 상황은 아주 정상인 듯 보였습니다. 여전히 성경을 읽고, 매일 기도하며, 가장 신실한 예배 참석자일지라도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와같음이 됨이 어찌 가는 하단 말인가?“ 저는 다른 성도들과도 아무런 영적인 교제가 없었습니다. 예배 참석자 중에 저는 노인이 아닌 극히 소수의 젊은이중의 하나였습니다. 목사님은 가능한 한 모든 주제에 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선 거의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성경읽기도 철저히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읽은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향이 되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이 없네, 벌써 다 아는 것이네“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중생활은 제게 양심의 가책을 주었습니다. 저는 저의 죄를 다른 사람의 죄보다 더 흉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만 더 나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저에 대해 실망했고, 만족할 수도 없었으며 저 스스로를 정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저에 대해 „이따위 게으르고, 잠자는 크리츠천이 있단 말인가?“ 자학했습니다. 그러나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보았고, 인생의 분명한 목표도 또 동기도 적었으며 허무하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습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젊은이가 이토록 벌써 인생에 피곤해 질 수 있단 말인가?“
몇해 전 제 눈이 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주로 실명이 되게하는 병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 후 첫해는 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였고, 또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차 가로등 기둥을 향해 걷거나, 돌에 걸려 넘어지고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실명하게 된다 말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취직 할 수 있을까?” ”독립성을 잃는 것은 아닌가?” “어떤 여자가 나와 결혼하고 싶어할까?” ”더이상 읽을 수 없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등등 큰 근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의 미래에 대해 어둡고 캄캄한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악한 감정은 갖지 않았지만 자기 연민이 밀려왔습니다. 또 이것이 무엇을 위해 좋단 말인가 자문해 보았습니다. 대학 7학기 때(지금부터 1년 반전) 안과 의사는 제게 권면했습니다 “자네에 긴급히 충고하는데 공부를 중단하고, 다른 것을 찾아보게나. 대학 공부를 끝내도 자네 눈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네.” 저는 그의 말이 악한 의도가 아니라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단 대학 공부는 계속 했습니다. 하지만 의욕이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마침내는 전공 공부를 위해 더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스포츠를 하던가 몇시간씩 방에 틀어박혀 공상에 빠져있곤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자주 제 자신에 대해, 지난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때 주위에 테두리를 그어 놓고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 저를 발견하였습니다. 제 안에 누구에게 수학과외를 시켜주던가 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을 위해 책임을 져야겠다는 소원이 생겼고 저는 제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방향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또 제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지 말씀하여 주시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이를 알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는 학생식당(Mensa–멘자)에서 Esther Kim (김에스더) 선교사님으로부터 성경읽기(공부)와 주일예배에 초청받았습니다. 저는 우선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에스더 선교사님은 눈에 띄도록 행복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예수님을 아주 사랑하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제 누이의 이름 역시 에스더입니다. 제가 그 곳에 한번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이 종일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저는 에스더 선교사님의 가정에 성령의 바람이 불고 예수님이 이들의 중심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아주 기뻤습니다. 첫 주일 예배는 믿음의 싸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제게 더이상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임스 김 선교사님과 요한복음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다시 올바로 근본적으로 읽게되어 기뻤습니다. 제임스 선교사님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저의 귀가 밝아졌습니다. 이는 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저는 진정으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두달 후 2002년 에링어펠트성 유럽 여름수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메세지, 음악 연주, 사람들의 친절함과 헌신에 크게 감동되어 자꾸만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번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임을 배웠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에 이제부터 다시 성경을 정말 집중하여 깨어서 읽으며 무엇보다 성경을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으로 읽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특별히 에베소서 4장17부터24절까지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서서히 한 말씀, 한 말씀이 저의 상황을 적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안에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마치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허망하고 어두워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며, 무지속에 완악한 마음으로 죄에 무감각하고, 욕심과 정욕에 빠져있었습니다. 처음엔 “내가 지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그렇지?”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저의 모든 것이 말씀에 꼭 정확히 씌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다음 말씀에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제게 이 상황에서 이것을 말씀하기 원하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새출발하도록 하나님께서 촉구하시며 초청하시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죄사함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진실로 살기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Part 3: 하나님을 위한 삶
이날 저녁 이후부터 저는 제 친구들도 예수님을 만나도록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다시금 영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행복을 찾아 가능한 모든 것을 시도하고, 수고하며, 무의미가운데 무력해져 버린 많은 사람들이 불쌍히 보였습니다.
영적인 질서를 다시 찾은 후 이제는 대학공부를 위한 방향을 찾아야 했습니다. 에스더 선교사님은 ‚제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시험준비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오직 제 영광을 위해서만 공부했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시험보기 전날 에스더 선교사님은 제게 선교사님의 아들 제임스가 하나님께 '시험보는 동안 그의 부족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두 눈을 감아 주도록’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이상한 소원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돼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니어 제임스에게 제 시험이 그렇게 중요하다니 기뻤습니다. 다음날 시험을 보는데 집중력이 떨어져 몇몇의 힌트를 받기 전(구술시험)에는 더이상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갑자기 교수님이 배석한 시험감독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한 쪽 눈을 감아줍시다.“ 시험감독관이 교수님께 대답했습ㄴ디ㅏ. „우리 두 눈을 다 감아줍시다“ 그러자 교수님은 „오케이, 우리 이 학생에게 A학점을 줍시다!“ 하였습니다. (독일에선 1점이라고 함, 1점부터 6점까지에서 1점이 최고 점수임) 저는 „이게 정말 진짜일 수 없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저의 부족함에 대해 교수님의 두 눈을 감게 하셨고, 또 스스로 두 눈을 감도록 하신 것입니다.
지난 해 Monbachtal(몬바흨탈) 가을 수양회에서 저는 예수님이 저의 선한 목자이신 것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아시며 필요를 공급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심지어 저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신 사건이 저를 감동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저도 방황하는 양들의 목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선 석사논문을 위한 테마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무엇으로 결정해야 할 지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힌트를 주시도록 기도하였지만 어떤 테마를 선택해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로 몇 주가 흘러갔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주 인상적인 방법으로 왜 아무런 힌트를 받지 못하고 있는가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먼저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훈련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저의 마음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곧 분명한 방향이 차례 차례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아주 기뻤으며 무슨 테마를 결정해야할지 더 이상 고민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임스 선교사님은 석사논문을 마태복음 6장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에 기초해서 쓸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한 학생과 성경공부를 시작하고자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사람에 대해 두려움이었습니다. 지난해 동안 어느 정도 수줍음이 줄어들었지만 사람에게 다가가거나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전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은둔의 삶을 사는 것을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타인과 말을 해야만 하는 어떠한 환경이든 다 피하고자 했습니다. 만약에 예전에 제가 이곳 이자리에 섰었더라면 아마도 저는 바닥으로 점점 가라 앉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제게 „두려워하지마, 여기서 아무도 널 물어 뜯지 않아“라는 말로 위로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늘 눈에 띄게 두려워하고 있는 인상을 퍼뜨리고 다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르는 사람에 말을 걸어야 했고, 또 걸고 싶었습니다. 발이 아파올 때 까지 꾸준히 수시간 동안이나 캠퍼스에서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한 학생을 성경공부에 초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결코 해낼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한 학생에게조차도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자꾸만 실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토록 큰 은혜를 확증하셨건만 제 자신은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시편 56편 10절에서 13절을 통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눈물이 나오도록 저를 아주 사로잡았고 저는 이 구절을 암송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나 여전히 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여러 다른 성경 말씀으로 격려하셨건만 유감스럽게도 허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요한계시록의 한 말씀으로 제게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 이날 비로서 저는 저의 자아를 극복하고 두명의 학생들에게 말을 걸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제 마음속에 사랑이 되살아나게 되었고 학생들을 더이상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한 사람이 „예“하며 초청에 응답하길 소망합니다. 초청 역사를 섬기며 행동하는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머무는 최선의 길임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금 말씀에 대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매일 즐거운 기대 가운데 스스로 물어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은 무엇을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실까?“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기꺼이 또 자주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제게 기쁨과 감사와 방향이 되며 저를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고 겸손히 읽고자 하며, 참으로 깨닫고 기억하며, 저 자신과 연관시키고자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 눈병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를 통해 무엇이 발생하는가에 하나님은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저를 통해 일하실 계획이 있으십니다. 이를 통해 제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제 스스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돕고 계십니다. 이를 통해 인생의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도록 드리는 것이 쉬워졌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제게 이를 감당할 인내와 힘을 주시어 저를 존귀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크신 은혜로 다시 기쁨과 소망과 확신을 회복케 하셨고, 저로 인생의 의미와 위대한 미래를 갖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므로 저는 아무런 근심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조차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언젠가는 영원히 그분과 함께 하늘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제가 이곳에서 그분을 위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상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헛되지 않습니다. 굉장한 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와 인내와 자비의 하나님께, 또 저를 위해 기도하시고 많은 사랑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저의 주님이시라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제가 학생들 가운데 예수님의 증인이 되고, 그들의 목자요 성경선생이 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며 예수님을 섬기고 감사하겠습니다.
한마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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