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여름수양회 개회 메세지-책 편집시 올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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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24일 여름수양회 개회 심령이 가난한자의 복
말씀 : 마태복음 5.3 송 모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안녕하십니까? 여름 수양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좋은 수양관으로 초청하시고 천국 말씀잔치를 배푸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드디어 애타게 사모하던 여름 수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대하신대로 이제부터 3박4일간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잔치가 될 것입니다. 한달 전부터 동교와 새대전, 신수센터에서 합심하여 정성스럽게 준비한 말씀과 소감, 찬양과 연극들이 우리의 심령을 참 만족하게 채워 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수양회를 시작하면서 아주 은혜로운 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개회말씀의 제목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입니다. 다 같이 마태복음 5장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잠간 기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을 여는 첫 관문과 같습니다. 신상수훈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국의 대헌장이요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의 요약입니다. 그 가운데서 이 팔복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수백의 보석을 달아놓은 왕관 같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가 유학할 때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힌두교인이였지만 산상수훈을 읽고 감명을 받아 산상수훈을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의 삶과 민족을 지도하는데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말씀 가운데서 팔복의 첫번째 가르침인 마 5:3은 팔복의 모든 것을 여는 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만큼 가장 근본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5.3 말씀을 정말 사랑하고 마음에 담아 그렇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시민으로 살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심령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인 문제, 육체적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령의 문제라 하십니다. "심령"이란 헬라어의 의미는 "영"이라는 것이고 "마음"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시민의 성품을 갖고 살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천국시민의 요소를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조직신학자 벌콥 박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위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행하고 찬송하며 봉사합니다. 모든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마음이 어떠한가가 중요한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복이 있는가 알아 봅시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성품은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들어다 보니까 가난하여서 다른 사람앞에 내세울 것이나 남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토코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또 이 단어는 명성이나 능력이 아무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공격에 대해 방어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에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좋아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두 가지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안에 선함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 곧 세리는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지만 그는 똑바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까? 바로 세리입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누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세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앞에 서서 깨어진 마음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보좌와 온 성전에 하나님의 옷자락이 가득하고 천사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노래하는 광경을 봅니다. 그 때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연기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광경앞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5)라고 탄식합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썼을 때는 아주 잘 나갈 때였습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때였습니다. 병자도 낫고 복음이 소아시아와 유럽에 증거될 때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마치 대단한 능력의 사람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순간에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합니다. 이런 바울의 탄식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죄인된 것을 발견하고 회개의 고백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깨어진 사람, 그래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신의 영적 파산을 깨닫는 사람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이것 저것으로 만족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이것 저것으로 만족하며 사시는 부유한 마음이시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오래 굶은 사람만이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압니다. 가난해 본 사람들은 돈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압니다. 심령이 가난해 지면 비로소 그리스도가 얼마나 나에게 필요한 가를 깨닫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무능을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열등의식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42편에 나오는 시편기자처럼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뵈올꼬...” 여러분들은 이런 기가 막힌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해 보셨습니까?
물질의 욕심이나 세속적인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숨겨진 계산과 음모가 없이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수양회에 임하시면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그렇다면 왜 심령의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가지 복이 있는 성품 중에 맨 앞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자기 의가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심령의 가난함이 다른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애통할 수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온유하지도 못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길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케 되지도, 화평케 하지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 안에 있는 추악한 죄를 깨닫고, 자기의 의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둘째 아들이 언제 소망이 있었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할 때 소망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때 그는 부자였습니다. 아버지를 찾을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돈을 다 쓰고 거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가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가난하기도 했습니다.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도 주린 배를 채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비로소 가난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17-2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죽는 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자신의 무능을 알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순간 바로 그 때가 은혜의 시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보십시오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으려면 그 잔이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교만과 거짓과 탐욕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생수를 부으시기 위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비우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더러움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기까지 결코 그리스도의 가치를 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마음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천국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천국의 의미는 우리 속에 임하는 천국과 우리가 장래에 가게 되는 기업으로 주실 천국의 두 가지 입니다.
1)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에 존재하는 영적인 실체라고 말합니다.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기쁨)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주십니다. 이렇게 깊은 영적인 생활은 지금 우리가 이 땅위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2)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업이 됩니다. 마 25:34에 보면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나라인 동시에 장래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유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심령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교만한 심령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왕이실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셨습니다.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현실적인 집이 서기 전에 이미 그 마음 속에 그 집이 먼저 지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천국이 장차 실현될 천국의 기본인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심으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 안에 비로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장래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왔고, 우리는 그 축복, 하나님의 백성됨의 축복을 지금 맛보며, 천국의 삶을 누리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된 완전한 천국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주 가난하게 어린시절을 보내고 24년전 은행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재산저축, 주택부금을 들어놓고 저축하면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잘 살수 있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3년 후에 만기된 재형저축을 찾고 주택부금으로 많은 대출받아 집을 샀습니다. 그러고서 집값이 오르면 큰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집을 사면서부터 정말 잘 안되었습니다. 집값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대출이자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총각이니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출이자가 월급만큼이나 되는 것을 감당하는 자체가 힘들었고 세를 사는 분들이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살기 어렵다고 집수리부터 해달라 했었습니다. 1년간을 버텨 봤으나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손해를 보고 팔아버렸습니다. 엎친데 덮쳐서 집 판돈이 있는 것을 아는 분에게 사업자금으로 빌려 주었다가 사업이 망하여서 한 푼도 돌려 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알거지가 되었지요. 마음이 깨어지는 고통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누가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하고 전도하는 사람에게 말했지요. ‘맘이 약하니까 믿는 거지 강해봐라 와 믿노?’ ‘믿는다는 놈들이 나뿐 더 짖 마이 한데이 시간 뺏기고 돈주고 뭐 배울거라고 믿노’ ‘바보 짖 나는 안 한데이’ 제가 얼마나 무지하고 교만하며 기고만장한지 자신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파산상태가 되고 깨어진 상처로 인하여 너무 절박해서야 제가 자만하고 부족한 놈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스스로 그 상태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지요. 누가 이 사망의 고통에서 건져 내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할때 하나님은 궁휼히 여기시고 한 직장동료을 보내셨는데 그는 ‘성경공부하면 그런 것은 다 해결되고 문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동료의 성경공부 초청을 물에 빠진 자에게 던지는 생명 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의 인도 받아서 UBF 종로센터에 나와 요한복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교만을 책망했고. 저의 자만심을 무너뜨렸습니다. 낮아지고 겸손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비로소 제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여름 수양회에 초청받고 나의 무능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며 회개소감을 써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천국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 곧,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은혜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 후 가난한 신령에 천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 증거자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저는 이 말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합니까?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늦기 전에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은혜와 긍휼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을 갖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수양회에서 말씀을 사모하여서 주제강의 문제를 잘 풀어 분반공부에 참여합시다. 강의마다 마음문 다 열어 놓고 들읍시다.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고 구체적으로 주님에게 고백을 드리며 주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가고자 결단하는 소감을 써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수양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난한 심령을 회복하고 말씀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말씀 : 마태복음 5.3 송 모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안녕하십니까? 여름 수양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좋은 수양관으로 초청하시고 천국 말씀잔치를 배푸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드디어 애타게 사모하던 여름 수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대하신대로 이제부터 3박4일간은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잔치가 될 것입니다. 한달 전부터 동교와 새대전, 신수센터에서 합심하여 정성스럽게 준비한 말씀과 소감, 찬양과 연극들이 우리의 심령을 참 만족하게 채워 줄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수양회를 시작하면서 아주 은혜로운 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개회말씀의 제목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입니다. 다 같이 마태복음 5장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잠간 기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을 여는 첫 관문과 같습니다. 신상수훈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국의 대헌장이요 그리스도의 모든 교훈의 요약입니다. 그 가운데서 이 팔복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수백의 보석을 달아놓은 왕관 같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인 마하트마 간디가 유학할 때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힌두교인이였지만 산상수훈을 읽고 감명을 받아 산상수훈을 사랑하게 되었고 자신의 삶과 민족을 지도하는데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말씀 가운데서 팔복의 첫번째 가르침인 마 5:3은 팔복의 모든 것을 여는 키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만큼 가장 근본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5.3 말씀을 정말 사랑하고 마음에 담아 그렇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시민으로 살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심령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인 문제, 육체적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령의 문제라 하십니다. "심령"이란 헬라어의 의미는 "영"이라는 것이고 "마음"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시민의 성품을 갖고 살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천국시민의 요소를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조직신학자 벌콥 박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위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행하고 찬송하며 봉사합니다. 모든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마음이 어떠한가가 중요한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복이 있는가 알아 봅시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이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성품은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을 들어다 보니까 가난하여서 다른 사람앞에 내세울 것이나 남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토코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살수 없는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또 이 단어는 명성이나 능력이 아무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공격에 대해 방어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에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좋아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함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의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두 가지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안에 선함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진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대조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 곧 세리는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지만 그는 똑바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까? 바로 세리입니다. 누가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받았습니까? 누가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세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앞에 서서 깨어진 마음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보좌와 온 성전에 하나님의 옷자락이 가득하고 천사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노래하는 광경을 봅니다. 그 때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연기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광경앞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고백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도 자신을 가리켜서 말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그리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5)라고 탄식합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를 썼을 때는 아주 잘 나갈 때였습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때였습니다. 병자도 낫고 복음이 소아시아와 유럽에 증거될 때였습니다. 우리 같으면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마치 대단한 능력의 사람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순간에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탄식합니다. 이런 바울의 탄식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죄인된 것을 발견하고 회개의 고백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깨어진 사람, 그래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신의 영적 파산을 깨닫는 사람은 기가 막힌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이것 저것으로 만족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이것 저것으로 만족하며 사시는 부유한 마음이시라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유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오래 굶은 사람만이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압니다. 가난해 본 사람들은 돈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압니다. 심령이 가난해 지면 비로소 그리스도가 얼마나 나에게 필요한 가를 깨닫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무능을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열등의식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절박감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42편에 나오는 시편기자처럼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뵈올꼬...” 여러분들은 이런 기가 막힌 심정으로 하나님을 갈망해 보셨습니까?
물질의 욕심이나 세속적인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숨겨진 계산과 음모가 없이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수양회에 임하시면서 하나님께 대한 갈망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그렇다면 왜 심령의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첫째,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가지 복이 있는 성품 중에 맨 앞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자기 의가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심령의 가난함이 다른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애통할 수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온유하지도 못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길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케 되지도, 화평케 하지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 안에 있는 추악한 죄를 깨닫고, 자기의 의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그리스도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둘째 아들이 언제 소망이 있었습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할 때 소망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때 그는 부자였습니다. 아버지를 찾을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러다가 가진 돈을 다 쓰고 거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가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가난하기도 했습니다. 돼지를 치는 자가 되었고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로도 주린 배를 채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비로소 가난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17-2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죽는 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자신의 무능을 알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순간 바로 그 때가 은혜의 시간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보십시오 잔에 포도주를 가득 부으려면 그 잔이 비워져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교만과 거짓과 탐욕이 가득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생수를 부으시기 위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먼저 비우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더러움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기까지 결코 그리스도의 가치를 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마음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닙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천국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천국의 의미는 우리 속에 임하는 천국과 우리가 장래에 가게 되는 기업으로 주실 천국의 두 가지 입니다.
1)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에 존재하는 영적인 실체라고 말합니다.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기쁨)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주십니다. 이렇게 깊은 영적인 생활은 지금 우리가 이 땅위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입니다.
2)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기업이 됩니다. 마 25:34에 보면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영적인 나라인 동시에 장래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유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가난한 심령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교만한 심령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왕이실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셨습니다.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현실적인 집이 서기 전에 이미 그 마음 속에 그 집이 먼저 지어져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천국이 장차 실현될 천국의 기본인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심으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사모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 안에 비로소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장래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왔고, 우리는 그 축복, 하나님의 백성됨의 축복을 지금 맛보며, 천국의 삶을 누리다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완성된 완전한 천국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아주 가난하게 어린시절을 보내고 24년전 은행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재산저축, 주택부금을 들어놓고 저축하면서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잘 살수 있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3년 후에 만기된 재형저축을 찾고 주택부금으로 많은 대출받아 집을 샀습니다. 그러고서 집값이 오르면 큰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면 다 잘 될 것이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이었지요. 그런데 집을 사면서부터 정말 잘 안되었습니다. 집값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대출이자가 내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총각이니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출이자가 월급만큼이나 되는 것을 감당하는 자체가 힘들었고 세를 사는 분들이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살기 어렵다고 집수리부터 해달라 했었습니다. 1년간을 버텨 봤으나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손해를 보고 팔아버렸습니다. 엎친데 덮쳐서 집 판돈이 있는 것을 아는 분에게 사업자금으로 빌려 주었다가 사업이 망하여서 한 푼도 돌려 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알거지가 되었지요. 마음이 깨어지는 고통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누가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하고 전도하는 사람에게 말했지요. ‘맘이 약하니까 믿는 거지 강해봐라 와 믿노?’ ‘믿는다는 놈들이 나뿐 더 짖 마이 한데이 시간 뺏기고 돈주고 뭐 배울거라고 믿노’ ‘바보 짖 나는 안 한데이’ 제가 얼마나 무지하고 교만하며 기고만장한지 자신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파산상태가 되고 깨어진 상처로 인하여 너무 절박해서야 제가 자만하고 부족한 놈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스스로 그 상태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지요. 누가 이 사망의 고통에서 건져 내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할때 하나님은 궁휼히 여기시고 한 직장동료을 보내셨는데 그는 ‘성경공부하면 그런 것은 다 해결되고 문제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동료의 성경공부 초청을 물에 빠진 자에게 던지는 생명 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의 인도 받아서 UBF 종로센터에 나와 요한복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교만을 책망했고. 저의 자만심을 무너뜨렸습니다. 낮아지고 겸손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비로소 제가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해 여름 수양회에 초청받고 나의 무능과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며 회개소감을 써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천국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 곧,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평안과 은혜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 후 가난한 신령에 천국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 증거자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저는 이 말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원합니까? 그리고 천국을 소유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늦기 전에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끼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은혜와 긍휼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난한 마음을 갖는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수양회에서 말씀을 사모하여서 주제강의 문제를 잘 풀어 분반공부에 참여합시다. 강의마다 마음문 다 열어 놓고 들읍시다.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고 구체적으로 주님에게 고백을 드리며 주님의 인도하시는 길을 가고자 결단하는 소감을 써서 주님 앞에 나아갑시다.
이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수양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난한 심령을 회복하고 말씀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아 천국의 기쁨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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