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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사라 배리⑹] 1964년 제주에 첫 선교사 파송 ‘뜨거운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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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1,749회 작성일 05-01-0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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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ukminilbo.co.kr/online_image/2005/0102/20040102_32_01.jpg" align=left hspace=10 vspace=10>오늘의 선교 한국을 바라보면서 초창기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소속 스태프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감히 ‘세계선교’라는 말을 할 수도 없던 그 당시에 우리는 피와 땀과 눈물로 선교의 씨앗을 뿌렸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가 뿌린 씨앗을 발아시켜 큰 열매를 맺게 해주시리라는 확신뿐이었다. 과연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셨다. 우리의 기도대로 오늘 한국의 선교사들은 전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1964년 제주도에 첫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우리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물론 해외가 아닌 제주도였지만 모든 선교회 간사와 학생들은 눈물로 기도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주도에서 시작된 복음화의 불길이 전 세계를 뒤덮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주세요.”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를 드리며 우리는 선교사를 파송했다.

제주도 선교사 파송은 학생들의 선교 열정에 불을 댕겼다. 모두 ‘가서 제자 삼아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를 신앙적 결단을 하게 됐다. 학생들에게 내재된 신앙적 열정이라는 기름에 불을 붙인 사건이 바로 제주도 선교사 파송이었다. 우리는 제주도를 탐라국이라 부르며 동남아 개척의 첫 관문으로 생각하며 기도했다.

당시 제주도에 도착한 자매 선교사는 열심히 캠퍼스 학생들에게 전도하며 사역을 펼쳤다.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주님의 심장을 가지고 제주도에서 개척의 역사를 쓰던 자매 선교사의 편지를 읽으며 광주 등지에서 사역하던 선교회 간사들은 하나가 되어 뜨거운 중보기도를 드렸다. 동시에 물질적으로 자매 선교사를 지원하기 위해서 선교헌금을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은 너무 가난했다. 선교 헌금을 드릴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선교 열정으로 타오른 그들은 무엇이든지 드리고자 했다. 어떤 학생은 20리를 걸어서 통학하면서 버스비를 모아 선교헌금을 드렸다. 어떤 학생은 시계를 전당포에 잡히기도 했다. 많은 학생이 손수레로 연탄을 배달하여 선교헌금을 드렸다. 또 당시에는 헌혈하면 상당한 돈을 주었는데 많은 학생이 헌혈하고 받은 돈을 모두 선교헌금으로 드렸다. 젊은 학생들이 자신의 피를 주님께 드린 것이다. 이렇게 선교헌금을 드림으로써 우리 모임은 자립을 하게 되었다. 이어서 전주 대전 대구 서울에 목자를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했다.

어느 날 대전을 다녀온 이창우 선교사가 광주센터의 문짝을 뜯어 용달차에 싣는 모습을 보았다. “왜 문짝을 뜯느냐”는 질문에 이 선교사는 “도와줄 것이 없으니 문짝이라도 뜯어다가 도와야지요”라고 대답했다. 지금은 천국에서 주님과 함게 거닐고 있을 이 선교사의 헌신이 눈에 선하다. 이같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에 지난 시절이 원통하기보다는 너무나 아름답게 기억된다.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고생을 낭만으로 알면서 학생들은 보내는 선교사로 선교에 헌신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자기희생의 정신을 본받아 구제에도 힘썼다. 성탄 때마다 양로원과 보육원을 찾아 구제했다. 당시에는 걸인들이 참으로 많았다. 학생들은 시절마다 직접 음식을 만들고 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다. 구제사업은 점차 커져서 나중에는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북한 등에까지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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