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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사라 배리 ⑸] 대학마다 불붙은 ‘풀뿌리 기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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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1,696회 작성일 05-01-04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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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ukminilbo.co.kr/online_image/2004/1230/20041230_35_01.jpg" hspace=10 align=left vspace=10>이창우 선교사는 조그마한 체구에 말수가 적은 조용한 사람이었다. 전북대 철학과와 장신대를 졸업한 이 선교사는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으며 부드럽기보다는 모든 면에서 철저한 인텔리로 보였다. 마치 혁명을 꿈꾸는 파리한 지성인과도 같았다. 항상 재건복을 입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선교사는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나가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길을 왕래하며 영원에 대한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됐다고 한다. 외관상 너무 약하게 보여 ‘과연 학생들을 다룰 영적인 파워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선교사에게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주님이 주신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 선교사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고 평생을 그 말씀대로 살았다.

우리는 광주 대인동 건물 1층에 학생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했다. 광주대인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하고 대학생성경연구회라는 단체도 만들었다. 그것이 한국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의 시작이었다.

초창기 광주대인교회에는 거리의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도 있었다. 그 전도사는 창녀를 교회로 데려오기도 했다. 그 창녀가 회개해서 복음을 받아들여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선교사는 교회 사역보다는 학생들의 복음화에 더욱 진력했다. 결국 학생 복음 운동에 더욱 치중키로 하고 교회에 사표를 냈다. 광주대인교회는 새로운 목회자를 초빙했으며 광주 시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교회는 이후 부흥을 거듭해 큰 교회로 성장했다. 하나님의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이 선교사와 나는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했다. 영어성경공부를 하러 다니던 학생들 가운데 복음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을 뽑아서 기도운동을 벌였다. 그 학생들 가운데는 현재 한국대표를 맡고 있으며 내년에는 내 뒤를 이어 세계대표로 취임할 전요한 목사가 끼여 있었다. 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이었던 전 목사는 성경공부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우리의 기도로 대학마다 ‘풀뿌리 기도운동’이 일어났다. 1년도 안돼 성경을 연구하는 소그룹 즉,1대1 모임이 80여개로 늘어났다. 나와 이 선교사는 성경공부 리더들을 역시 1대1로 준비시켰다. 이 선교사는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학생들이 늘면서 학교에 동아리 등록을 해야 했는데 이름이 없었다. 그때 정한 이름이 한국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였다. 선교회로 정식 등록하면서 우리는 세계선교의 위대한 비전을 성취해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선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세계선교에 우리를 드리기로 결정했었다.

나와 이 선교사는 학생들에게 “받는 생활보다는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선교사는 “‘거지 근성’을 타파하고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오병이어를 드리자’는 구호를 내걸고 세계선교 사역을 펼쳤다. 1964년에 처음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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