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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사라 배리⑷] 4·19 소식 듣고 학생 복음화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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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1,551회 작성일 04-12-29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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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mib.co.kr/online_image/2004/1229/20041229_39_01.jpg" align=left hspace=10 vspace=10>나는 1955년 한국땅에 도착한 후 4년여 동안 한국에서 사역했다. 내 20대는 순박한 한국인들과 함께 지낸 시절이었다. 되돌아보면 영광의 시절이었다. 한 번도 당시를 후회해본 적이 없다. 수많은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당시 교제했던 한국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남산감리교회 여자 성도였던 오복균 장로다. 나는 서울에 갈 때마다 혜화동 오 장로 댁에서 머물렀다. 복음에 대한 열정이 투철했던 분이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1959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갈 때 나는 오 장로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승낙하고 초청장을 보내줬다. 오 장로와 나는 미국에서 교회를 순회하며 한국 선교보고를 했다. 우리는 한복을 입고 선교보고를 했으며 많은 사람이 한국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고 한국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게 됐다. 1년간의 안식년을 선교보고하면서 지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 장로는 이후 볼리비아로 이민갔다가 미국에 정착했다. 남편이 사업을 해서 큰 부자가 됐다고 한다.

오 장로는 기도와 전도에 전념한 초창기 한국 교회의 전형적인 전도 부인과 같았다.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 능력도 갖고 있었다. 한 번은 내가 시골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데 누가 귀신 들린 여인을 데리고 왔다. 나와 오 장로는 밤새 그 여인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그 여인은 새벽에 갑자기 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귀신이 떠났고 여인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 장로는 기도 능력이 있는 크리스천이었다. 한국 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면에는 오 장로와 같이 기도하는 수많은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자유와 민주를 위해 봉기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됐다는 뉴스는 미국 언론에서도 크게 다뤘다. 당시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할지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시골을 다니는 순회전도가 재미는 있었지만 정작 한국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학생 혁명 소식을 듣고 학생들을 복음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 복음화에 대한 소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선교부에 한국에 돌아가면 학생들을 전도하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학생들에게 영어 성경을 가르치면서 전도하고 제자 삼고 싶었다. 선교부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선교부에서는 별도의 재정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선교사 사택비를 가지고 사역을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961년 한국에 돌아와 광주시 대인동에 집을 얻었다. 나는 2층에 살고 아래층에 학생들을 모아 성경공부를 시켰다.

그곳에서 나는 이창우 선교사를 처음 만났다. 주님의 사역을 위한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수많은 만남이 있지만 나와 이창우 선교사의 만남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계셨다. 훗날 이사무엘 선교사로 알려진 그는 당시 장신대를 졸업하고 강도사로서 광주에 내려와 학생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진력했다. 우리는 학생 복음화라는 동일한 키워드를 지니고 함께 사역했다. 그것이 바로 대학생 성경읽기선교회의 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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