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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대학생 성경읽기선교회 대표 사라 배리 선교사 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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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1,464회 작성일 04-12-2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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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mib.co.kr/online_image/2004/1228/20041228_39_01.jpg" align=left hspace=10>25살 되던 1955년에 나는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는 아직도 전쟁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휴전이 성립됐으나 빨치산 등이 남한내에서 발호하고 있는 극히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던 한국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대사를 행하신다는 큰 기대를 안고 한국으로 떠났다.

사실 나는 한국에 가려고 결심하기 전까지는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알았으나 당시 미국인으로서 한국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나라였다. 오직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분단국가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국행을 결심한 뒤 한국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한국 학생들은 한결같이 똑똑했고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유니언 신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이상근 박사 등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학적으로도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나는 한국역사와 한국교회사를 공부했다. 한국교회가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1900년에서 1910년사이에 한국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다. 원산대부흥과 백만인구령운동 등 한국내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한국교회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자립심이 강했고 전도와 제자양성에 뛰어났다는 사실도 알았다. 수많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나의 한국 알기는 지속되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내게 결혼할 것을 권유했으나 결혼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혼보다는 한국에서 내가 행할 사역이 더욱 흥미로웠다.

드디어 한국에 도착해서 나는 남장로교 선교부가 치중했던 호남지역 선교에 매진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영광,화순 등지를 돌면서 한국인들을 위한 구령사역을 펼쳤다. 순회전도자로서의 사역을 한 것이다. 당시 호남지역의 벽지에는 미자립 교회들이 많았다. 모두가 찢어지게 가난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이라고 확신했다. 복음안에서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을 전했다. 순회전도를 펼치면서 과부가 된 여성 크리스천들에게 재봉기술을 가르쳐주고 성경을 공부시켜 전도사로 키우는 닐 선교학교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시골을 다니면서 한국인들이 너무나 가난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모두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큰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수많은 어린이들이 구경을 왔다. 한국인들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전쟁직후 외국인들에게 의지하려는 일종의 거지근성도 갖고 있었다. 구호물자를 얻기 위해서 싸우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흔한 풍경이었다. 나는 요즘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당시를 생각하며 너무나 발전한 한국 사회를 보고 감사한다. 지금의 세대들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웠던 시절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국을 사랑하시고 한국 크리스천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 땅을 부유하게 만드셨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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