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사라 배리 ⑵] 한국전쟁 뉴스보고 한국행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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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mib.co.kr/online_image/2004/1227/20041227_32_01.jpg" align=left hspace=10 vspace=10> 대학 2학년 때 한 친구가 로마서를 연구하는 성경공부반으로 인도했다.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했다.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해 믿음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십가가와 대속의 피에 대해서 깊이 묵상했다.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신앙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성경 말씀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했다.
로마서를 공부하던 중 침례교 소속 한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담임목사가 “누구든지 예수님께 고백하고 싶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다. 나는 강단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인 후 대학 기독교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독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학교에서 가르쳤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 평생 복음에 충만한 삶을 살고 싶었다.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모두 일단 대학을 마치라고 권유해 결국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유니언 신학교에 속한 장로교기독교교육신학교에 들어갔다. 1년을 공부한 뒤 고향에 돌아와 전도 활동을 벌였다. 미시시피 주립대학교의 목사님이 학교로 와서 학생복음운동을 벌이자고 권유했다. 3년여 동안 학생들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진력했다.
내가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미시시피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많은 흑인 일꾼들을 보아온 나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인종차별은 결코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에서 흑인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주위에서는 내가 너무 진보적인 여성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다. 신학교때 석사논문 제목이 ‘남장로교가 인종차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였을 정도로 비판정신이 충만했다.
대학에 다닐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뉴스를 보면서 전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한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공산당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진 못하지만 선교사로 나가 사람들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꼭 한국에 가겠다는 생각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해서 평화를 이뤄야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왜 하셨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선교사로 자원한 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시험을 보았다. 합격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신학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뉴욕의 성서신학교에서 귀납적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당시 뉴욕의 신학교에는 이상근 박사 등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1년 동안 성경과 언어 등을 배우고 1955년에 한국에 갔다. 배로 한달을 걸려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땅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앞으로 내 인생이 한국과 한국인들을 위해서 바쳐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신앙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성경 말씀을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접했다.
로마서를 공부하던 중 침례교 소속 한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을 때 담임목사가 “누구든지 예수님께 고백하고 싶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다. 나는 강단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인 후 대학 기독교학생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독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학교에서 가르쳤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 평생 복음에 충만한 삶을 살고 싶었다.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모두 일단 대학을 마치라고 권유해 결국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하자마자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유니언 신학교에 속한 장로교기독교교육신학교에 들어갔다. 1년을 공부한 뒤 고향에 돌아와 전도 활동을 벌였다. 미시시피 주립대학교의 목사님이 학교로 와서 학생복음운동을 벌이자고 권유했다. 3년여 동안 학생들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진력했다.
내가 공부할 때만 하더라도 미시시피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많은 흑인 일꾼들을 보아온 나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인종차별은 결코 성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에서 흑인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주위에서는 내가 너무 진보적인 여성이라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백인이든 흑인이든 모두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다. 신학교때 석사논문 제목이 ‘남장로교가 인종차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였을 정도로 비판정신이 충만했다.
대학에 다닐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뉴스를 보면서 전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한국에 있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공산당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견딜 수 없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진 못하지만 선교사로 나가 사람들에게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꼭 한국에 가겠다는 생각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를 양성해서 평화를 이뤄야겠다는 강한 결심을 하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왜 하셨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선교사로 자원한 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시험을 보았다. 합격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신학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뉴욕의 성서신학교에서 귀납적 성경공부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당시 뉴욕의 신학교에는 이상근 박사 등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1년 동안 성경과 언어 등을 배우고 1955년에 한국에 갔다. 배로 한달을 걸려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땅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앞으로 내 인생이 한국과 한국인들을 위해서 바쳐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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