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사라 배리 ⑴] “내 젊음 바친 한국은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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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배 사라다. 사라 배리라는 미국 이름보다 나는 배 사라라는 한국 이름을 더욱 좋아한다. 내 젊음의 열정을 바친 한국은 주님이 내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으며 사명을 완수할 장소였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담당하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에 온 1955년 이후 한국은 나의 사랑이었으며 한국인은 나의 애인이었다. <img src="http://www.kmib.co.kr/online_image/2004/1226/20041226_32_01.jpg" align=left hspace=10 vspace=10> 지난 50년 동안 나는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함께 전도했다. 얼마나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는지 아직도 나는 제법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77년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이후에도 줄곧 대학생성경읽기회의 한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비록 내 나이 74세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적지만 남은 생을 더욱 활기차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지난날 한국인들과 지냈던 추억들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1930년 1월21일 미국 미시시피주 베노이트에서 태어났다. 우리집은 동네에서도 널리 알려진 큰 농장을 지니고 있었다. 농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으며 수많은 흑인 노예가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개인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농장에는 우리 가족의 박물관도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대농장주의 딸로 ‘미시시피의 공주’라는 소리를 들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시시피의 공주’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결국 74세가 될 때까지 왕자님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살았다. 선교사가 된 이후 나는 예수님과 결혼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과 잃어버린 영혼이 나의 수많은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미시시피의 공주’로 평생을 살았다면 나는 지금쯤 과거를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이후에 공주처럼 살지 못했지만 내면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았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나는 너무나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
장성한 뒤 미시시피 여자주립대에 입학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같은 대학을 나왔다. 화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전공 공부보다는 기독교 활동을 많이 했다. 대학 기독학생회 회장일을 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하기도 했다. 방학 때에는 장로교 지방노회를 돌아다니면서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장로이신 아버지나 할머니,어머니 등 모두 교회일에 열심이셨다.
사실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예수님에 대해 무지했다. 대학에 들어간 직후 어느 날 인생이 외롭고 의미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운명처럼 성경을 펼쳐보았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이 보였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다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1930년 1월21일 미국 미시시피주 베노이트에서 태어났다. 우리집은 동네에서도 널리 알려진 큰 농장을 지니고 있었다. 농장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으며 수많은 흑인 노예가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개인 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농장에는 우리 가족의 박물관도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대농장주의 딸로 ‘미시시피의 공주’라는 소리를 들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시시피의 공주’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결국 74세가 될 때까지 왕자님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살았다. 선교사가 된 이후 나는 예수님과 결혼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과 잃어버린 영혼이 나의 수많은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미시시피의 공주’로 평생을 살았다면 나는 지금쯤 과거를 후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이후에 공주처럼 살지 못했지만 내면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았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면서 나는 너무나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
장성한 뒤 미시시피 여자주립대에 입학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모두 같은 대학을 나왔다. 화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전공 공부보다는 기독교 활동을 많이 했다. 대학 기독학생회 회장일을 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하기도 했다. 방학 때에는 장로교 지방노회를 돌아다니면서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장로이신 아버지나 할머니,어머니 등 모두 교회일에 열심이셨다.
사실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예수님에 대해 무지했다. 대학에 들어간 직후 어느 날 인생이 외롭고 의미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 운명처럼 성경을 펼쳐보았다. 야고보서 1장 5절 말씀이 보였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다면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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