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사라 배리 ⑼] 서울서 대학생 전도 나서자 “꿈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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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mib.co.kr/online_image/2005/0105/20050105_28_01.jpg" align=left hspace=10 vspace=10>서울에 지부를 개척하기 전에도 광주 지역 학생들은 방학 기간이 되면 귀향한 서울 유학생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나는 이들에게도 영어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기도모임을 가졌다. 학기가 시작되어 이들이 서울로 올라간 후에는 이창우 선교사가 한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 이들을 모아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전국을 개척하려면 반드시 전략적으로 서울대를 개척해야 된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1966년 봄 나는 사역지를 서울로 옮겼다. 당시 서울대는 종로5가 연건동(현 대학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학교 근방에 셋집을 얻어서 학생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이창우 선교사 가정도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이 선교사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 대학교수가 우리에게 “광주에서는 학생 복음 운동이 잘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는 안된다. 다른 기독교 기관들도 학교 앞에 학생전도를 위해 건물까지 지었으나 모두 텅텅 비었다. 꿈을 깨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광주 전주 대구 대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도전했다.
하나님은 서울에서도 새 일을 행하셨다. 나와 이 선교사는 밤낮으로 기도하며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청했다.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리더들이 세워지고 캠퍼스에서 학생 리더들이 인도하는 그룹 성경공부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1978년 서울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학생들을 위한 영어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했다. 서울사역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었다.
1968년부터 리더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일용할 양식’이라는 큐티 안내서를 집필하여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한국 최초의 큐티 안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체계적인 1대1 성경공부 교재를 개발했다. 말씀을 공부한 후에는 받은 은혜를 글로 발표하게 했다. 말씀을 내면화하는 소감을 쓰게 한 것이다. 방학 때에는 창세기 요한복음 로마서 이사야서 등 성경별로 성경학교를 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4박5일 수양회를 열고 학생 리더들 중에서 메신저를 뽑아서 훈련시켰다. 이를 통해서 학생들이 성경선생들로 성장했다. 또한 학생들에게 성경 본문을 암송하도록 훈련하였다. 소그룹 운동을 체계화했다. 또한 리더들끼리 모여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공동체 생활은 자아가 깨지고 예수님을 배우는 좋은 학교이고 기도와 말씀 중심 생활의 훈련장이었다. 서울대에서 시작된 복음역사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한양대 동국대 건국대 등 서울 지역 대학교로 번져나갔다. 해마다 학교 앞에 새로운 지부가 세워졌다. 양주선 이진희 김길수 목사 등 현재 한국UBF의 시니어 책임목자들과 서진태 최선웅 정은환 이병두 이사,김제임스 안요셉 안마리아 선교사 등 많은 리더가 서울 개척초기에 탄생한 인물들이다.
그 시대 우리는 정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 달렸다. 오직 학생복음화와 세계선교라는 목표를 붙잡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며 달려갔다. 그 달음질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당시는 외롭게 달렸지만 지금 수많은 복음 동역자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1966년 봄 나는 사역지를 서울로 옮겼다. 당시 서울대는 종로5가 연건동(현 대학로)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학교 근방에 셋집을 얻어서 학생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이창우 선교사 가정도 서울로 이사했다. 이때 이 선교사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 대학교수가 우리에게 “광주에서는 학생 복음 운동이 잘 되었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는 안된다. 다른 기독교 기관들도 학교 앞에 학생전도를 위해 건물까지 지었으나 모두 텅텅 비었다. 꿈을 깨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광주 전주 대구 대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도전했다.
하나님은 서울에서도 새 일을 행하셨다. 나와 이 선교사는 밤낮으로 기도하며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청했다.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리더들이 세워지고 캠퍼스에서 학생 리더들이 인도하는 그룹 성경공부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1978년 서울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학생들을 위한 영어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했다. 서울사역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었다.
1968년부터 리더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일용할 양식’이라는 큐티 안내서를 집필하여 출간하기 시작하였다. 아마 한국 최초의 큐티 안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체계적인 1대1 성경공부 교재를 개발했다. 말씀을 공부한 후에는 받은 은혜를 글로 발표하게 했다. 말씀을 내면화하는 소감을 쓰게 한 것이다. 방학 때에는 창세기 요한복음 로마서 이사야서 등 성경별로 성경학교를 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4박5일 수양회를 열고 학생 리더들 중에서 메신저를 뽑아서 훈련시켰다. 이를 통해서 학생들이 성경선생들로 성장했다. 또한 학생들에게 성경 본문을 암송하도록 훈련하였다. 소그룹 운동을 체계화했다. 또한 리더들끼리 모여 생활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공동체 생활은 자아가 깨지고 예수님을 배우는 좋은 학교이고 기도와 말씀 중심 생활의 훈련장이었다. 서울대에서 시작된 복음역사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한양대 동국대 건국대 등 서울 지역 대학교로 번져나갔다. 해마다 학교 앞에 새로운 지부가 세워졌다. 양주선 이진희 김길수 목사 등 현재 한국UBF의 시니어 책임목자들과 서진태 최선웅 정은환 이병두 이사,김제임스 안요셉 안마리아 선교사 등 많은 리더가 서울 개척초기에 탄생한 인물들이다.
그 시대 우리는 정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향해 달렸다. 오직 학생복음화와 세계선교라는 목표를 붙잡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며 달려갔다. 그 달음질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당시는 외롭게 달렸지만 지금 수많은 복음 동역자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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