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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사라 배리⑻] ‘땅끝 전도’ 결심… 대전이어 서울지부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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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1,617회 작성일 05-01-0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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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www.kukminilbo.co.kr/online_image/2005/0104/20040104_35_01.jpg" align=left hspace=10 vspace=10>4·19와 5·16을 거치면서 한국 대학생들의 진리에 대한 갈망은 커져갔다. 암울한 시대를 맞아 학생들은 온몸으로 사회문제에 부닥쳐 나가거나 아니면 진리를 향해 깊은 내면의 여행을 떠나거나 했다. 4·19 혁명 때 수많은 학생이 민주화를 위해 스러져 갔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보다 중요한 영혼의 혁명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기로 했다. 영혼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서 학생 복음역사는 계속 번져나갔다. 주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일단 심게 되면 30배,60배,100배의 결실을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시기였다.

전주에서 지부 개척에 성공한 우리는 중부지방의 중심지인 대전을 개척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정치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광주 전주 대전 등에 캠프를 마련,사역하고 있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서 남장로교나 북장로교 등 초기 한국 선교를 담당했던 미 선교부에서는 과도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 선교 지역을 나눴던 것이다. 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우리가 대전을 개척하려고 하자 광주를 벗어나 전주나 대전을 개척하는 것은 영역 침범이라고 지적했다.

광주 외 다른 지역을 개척하는 것을 금했다. 우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선교비 등 모든 지원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후원으로 사역을 펼쳐야 하는 선교사로서는 선교본부와의 마찰은 불이익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깊은 묵상과 기도 끝에 나는 지부 개척을 계속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그같은 결심을 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로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땅끝까지 전하게 하는 데는 모든 인간적인 고려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사람 모두 나를 버려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기쁘게 견딜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대전지부를 개척했다. 중부권에 놀라운 학생 선교운동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소망했다. 그 결과 미국 선교부에서 받던 물질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재정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마음은 무척 편했다. 대전지부 개척은 광주 등 전라도 지역에만 국한된 우리의 선교사역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실질적으로 대전지부 개척을 통해서 우리 선교회 활동은 서울을 향해서 뻗쳐나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파를 위해 로마로 가기를 그렇게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서울에 진출해 본격적인 복음 역사를 이루고 싶었다.

드디어 1966년 나와 이창우 선교사는 서울 개척을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떠나면서 우리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의 복음 역사가 쓰여질 수 있도록…. 우리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서울로 떠났다. 우리는 당시 서울대가 자리잡고 있던 종로5가 효제동 길가에 작은 셋방을 얻어 서울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때 당시 서울대생이던 양주선 이진희 김길수 주정숙 안성덕 등이 우리와 함께 공부하며 리더로 성장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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