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강 입니다.선생님들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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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용사여!
말씀: 사사기 6:1-32
요절: 사사기 6: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께서 가을학기 사사기를 통해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구원의 사랑을 배우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고통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기드온 한 사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는 소심하고 졸장부 같은 사람으로 구원역사에 쓰임 받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시므로 그를 이스라엘 구원역사에 귀하게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기드온을 부르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소심한 사람이라도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가 죽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도 어려운 시대 형편을 탓하며 좌절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기 인식을 새롭게 하게 하므로 우리에게 믿음과 용기를 줍니다. 이시간 말씀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나' 보다도 '하나님이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고 이를 영접하고 믿음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기드온을 부르신 하나님 (1-24)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드보라가 죽은 후에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셨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인내하시고 이들이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징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그들을 칠년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떠돌아 다니다가 파종 때가 되면 쳐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먹을 것과, 양이나 소, 나귀까지 모조리 쓸어가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미디안 족속 뿐만 아니라 아말렉, 동방의 아라비아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철만 되면 봉잡는 식으로 메뚜기 떼같이 쳐들어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로 인해 그 땅이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미약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이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 구멍이나 굴을 파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노숙자들같이 신문지를 덮고 잤습니다. 이떤 이들은 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 당하고 빼앗기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겨우 겨우 농사를 지어놓으면 때마다 나타나 모조리 뺏어가는 그 얄미운 미디안 족속들의 행위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러기를 칠년이 지난 후 이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진작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이렇게 칠년 후에나 하나님께 부르짖었을까요?
이는 이들이 처음 미디안 족속들이 쳐들어 올 때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즐긴 것을 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좀 즐기고 마음대로 살았기로 그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나름대로 합리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족속들에게 당할 때 이것도 한두번으로 '곧 끝나겠거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이 칠년이나 계속되자 그들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괴로우니까 부르짖은 것이지 죄를 회개하며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즉각 구원해주지 않고 한 선지자를 그들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출애굽과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시키시며 먼저 그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바알이나 아세라로부터 재앙이 임할까봐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열심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였지만 이들에게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풍년이나 평강이 아니라 약탈을 당하고 이제 먹고 살기도 힘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고통받게 된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도 직장이나 대학원 등에서 윗사람들의 분위기를 맞추지 않으면 혹시 망하는 것은 아닐까? 하며 두려움 때문에 말씀대로 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내면에 소신이 없어 미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또한 신념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면 내면이 강해지고 또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악을 깨닫게 한 후 사람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제 11절을 보십시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푸르른 상수리 나무 아래 앉았습니다.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는 미디안에게 빼앗기지 않은 밀이 있었는가 봅니다. 그런데 말타작을 하려면 넓은 마당에게 도리깨질을 하며 겨를 바람에 날려가며 해야되는데 그는 바위를 움푹 파서 만든 포도주 틀에 대고 밀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방을 흘끗 흘끗 쳐다보며 몸을 옹크리며 행여나 미디안 사람에게 들킬까봐 이렇게 몰래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조바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큰 용사여! You, Mighty Warrior! 'warrior'는 전사라는 뜻입니다. 막강한 전사여! 얼마나 멋진 호칭입니까? 이런 호칭을 들을 때 기드온의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몰래 숨어 밀타작을 하다가 갑자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간이 콩알만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를 부르는 소리인가 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를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뭐 내가 큰 용사라고, 누굴 놀리고 있나?'하는 생각에 자존심이 팍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는 차리리 '에라, 이 못난 놈아'하고 부르는 것이 덜 모욕적일 것입니다. 물론 기드온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디안 나쁜 놈들이 쳐들어와서 동족의 식량을 약탈하고 짐승들을 끌어가는 것을 보면 눈이 튀어나오고 이가 갈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떨쳐 일어나 이 못된 미디안 놈들 하고 이판사판 한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의 아버지가 이를 눈치채고 '애야, 네가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냐 다친다.' 하고 말렸습니다. 정말 생각해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런 그는 젊은이로서의 웅지를 품거나 내일에 대한 비전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국가나 민족, 정의와 사랑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이짓을 해야하나 생각하면 기분이 더럽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괴로웠습니다.
그는 갈 데 없는 졸장부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그를 '큰 용사여' 하고 불렀습니다. 기드온이 생각하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기드온과는 이렇게 다릅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는 용사입니다. 그것도 큰 용사입니다. 그러면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현재 모습보다도 장래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그는 소심한 졸장부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낙심과 죄절을 버리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큰 용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자기 자신을 큰 용사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그를 큰 용사로 부르신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 하나님을 영접할 때 그는 자신을 큰 용사로 인식하고 도전하며 민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며 사는가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75세가 되도록 자식하나 없는 불쌍한 시골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끊임없이 찾아 오셔서, 달래기도 하시며 책망도 하시면서 그가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로 자신을 인식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아예 그 이름까지도 '열국의 아비' 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한 베드로에게는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하심으로 그가 목자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도록 끊임없이 도와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축복과 성공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인식의 전환'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인식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자신을 못나고 가난한 사람으로 여기면 그는 일생 못난이같이 굴며 가난뱅이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만명을 먹여야할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언젠가 그는 큰 부자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나는 대학생을 먹이고 책임져야 할 목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때, 그런 사람들은 자연히 좋은 목자가 되고자 열심히 믿음의 투쟁을 합니다. 열심히 양들을 돌보고 기도하는 가운데 놀라운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은 우리를 '큰 용사여' 하고 부르십니다.
둘째,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주 틀에 숨어있는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신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요, 또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용사는 싸우는 사람입니다. 분명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전쟁에 나가 싸워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싸우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부르실 때는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강한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되풀이해서 죄악에 빠지는 이스라엘에게 실망치 않으시고 구원코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숨어서 타작이나 하고 있는 기드온을 큰 용사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물질주의와 육신주의의 우상으로 심히 미약해진 이 백성을 구하고 campus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큰 용사로 부르십니다. 이 시간 우리가 구원역사를 이루시고자 우리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로 키우기 위해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때 누구든지 큰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큰 용사가 되는 것은 개인의 자질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힘이 있어 큰 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으면 큰 용기를 얻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이 믿음이 그 사람과 삶을 변하게 합니다. 기드온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때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데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미디안의 군대가 아무리 강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이제까지 무엇을 하셨기에 우리가 이꼴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늘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악을 행하며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이들을 징계하시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원망과 푸념을 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여기서 '이 네 힘' 이란 포도주 틀에서 밀타작을 하는 힘을 말합니다. 기드온이 아무리 힘이 없고 약한 것같아도 그에게는 밀타작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힘만 있어도 그가 나가 미디안을 물리치기에 충분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민족을 구원하는 데에 아주 큰 힘이 있어야하는 것 같지만 사실 밥숟가락을 들고 밥 먹을 힘만 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미디안을 물리치기 위해 따로 힘을 키울 필요가 없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밀타작을 할 수 있는 그 힘만 있다면 누구든지 원수를 물리치고 큰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꽃동네'를 이루는데 밑거름이 된 최귀동 할아버지는 거지였습니다. 그는 음식을 구걸하다가 아파서 구걸하러 다니지 못하는 다른 거지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힘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우리에게 우리를 보내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자그마한 힘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개척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이 없다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할 때 쓴 힘은 지팡이 하나를 드는 힘이었습니다. 다만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고 그 힘으로 지팡이를 들어 애굽에 열 재앙을 내리고 그 힘으로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 사막에서 200만명의 자기 백성을 먹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 내게 밥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을 수 있는 힘이 있구나' 하며 내게 이 작은 힘이 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힘을 의지해 믿음으로 나갈 때 우리는 엄청난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그러나 기드온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제일 작은 지파, 그 중에서 극히 약한 집, 그중에서도 제일 작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배운 것도 변변치 않은 내가 무슨 능력으로 대학생들을 가르쳐 제자양성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 하리라.' 기드온은 약한 소리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이번에는 '반드시'라는 말을 넣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시며 그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사람 치듯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믿음을 심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II. 우상을 훼파한 기드온 (25-32)
그러면 실제 기드온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까?
첫째, 여호와 살롬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은혜를 입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은 꽤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실존과 부르심에 대해서 무엇인가 확실한 표징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을 참으시고 그가 요구한 표징을 보이셨습니다.
기드온은 고기와 무교전병을 바위에 놓고 그 위에 국을 쏟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사자가 지팡이를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떡을 태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젖은 바위에서 불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기드온은 표징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슬퍼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도, 민족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그러고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반발만 했습니다. 잘못된 것은 자기가 아니라 미디안이요, 하나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 앞에 서고 보니 그 크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그 크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큰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 이는 죄인 기드온에 게 임한 사죄의 음성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이러한 사죄의 음성을 듣고 거기에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단 이름을 하나님의 평강이란 뜻으로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습니다. 기드온은 사죄의 은혜를 입음으로써 마음에 평강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역사에 쓰임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도 그랬고(사 6:5-7) 베드로도 그랬습니다.(누가복음 5:8-10)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는 사람은 먼저 그 자신의 마음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내면에 죄의식이나 불안감, 두려움이 있으면 구원 역사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마음의 평강을 누릴 때 구원 역사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 순종하므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25,26 절을 보십시오. 그날 밤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이것을 보면 기드온의 집에는 동네 우상의 제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가 종 열명을 데리고 부수어야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이런 집에서 기드온도 아비의 영향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땔감으로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명령을 주셨을까요? 첫째는 기드온이 그 마음에 우상을 타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부터 먼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는 우상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앞에서 열심히 빌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풍요가 돌아오기는커녕 약탈을 당하고 이런 환란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나무토막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깨닫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상 실행하고자 하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했다가 먼저는 아버지에게 맞을 수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바알과 아세라의 노여움을 사서 저주가 임할 수 있습니다. 실제 26절을 보면 기드온은 이로 인해 두려움에 빠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어떤 이유에서건 두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기드온이 이렇게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성읍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알과 아세라에게 일용할 숭배를 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알의 단이 훼파되었고 단 곁의 아세라가 찍혔고 새로 쌓아 올린 단 위에 수소가 드려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이 이렇게 한 것을 알고 요아스에게 와 기드온을 끌어내 죽여야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요아스는 바알이 과연 신이면 단을 훼파한 자기 아들을 당연히 죽일 것이니 너희들은 가만 있으라고 하며 아들을 보호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통해 기드온을 보호해주셨습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성읍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가 고작해야 나무토막이요, 땔감 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날 사람들은 겁없이 바알을 찍어버린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바알과 싸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용맹을 인정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기드온은 큰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이렇게 우상을 타파하며 승리를 체험해야합니다. 저의 집에는 조그만 불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따라 교회를 나가고 싶어도 이 부처님이 무서워 나가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불상을 망치로 부셔버렸습니다. 그것은 고작 해야 석고덩어리에 불과 했습니다. 부적을 떼어버리면 귀신이 화를 내 재앙이 임할 것 같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고사를 안 지내면 재앙이 임할 것 같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우리 마음에는 이런 우상 말고도 물질의 우상, 정욕의 우상, 출세의 우상, 인정 받고자 하는 우상 등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상이나 자존심, 욕심 등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런 것을 포기하면 내 인생이 망하고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죽어버릴 것 같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힘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우상을 다 파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 모두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통해 이 시대의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영혼들을 끝까지 포기치 않고 구원코자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용사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영접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이 시대에 대해 절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큰 용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확신에 찬 목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 내면에 있는 어두움의 요소들,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campus 구원 역사에 새롭게 도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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